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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대술면 한산 이씨의 흔적을 찾아서

아계 이산해 묘, 이광임 선생 고택,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

2024.03.16(토) 07:59:53안개비(hae04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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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계 이산해 영당 단청


유교에서 연꽃은 군자의 청빈과 고고함을 상징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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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산군 대술면 방산 저수지 일대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인근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군자의 덕목을 실천하며 한치 부끄러움 없이 살아간 한산 이씨 선비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요,
아계 이산해의 묘와 영당, 신도비를 시작으로 이광임 선생과 수당 이남규 선생의 고택 순서대로 그분들의 흔적을 살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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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판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안내판을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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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계 이산해 묘와 영당


아계 이산해 선생의 영당에 도착하니, 우측 산으로 묘소를 올라갈 수 있더군요.
대문장가이자 북인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1539~1609)는 목은 이색의 7대손이며, 숙부(작은 아버지)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선생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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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해 영당


아계 선생은 그림과 서예에 모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아계 유고'를 남겼지요.
영당의 영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수당 이남규 선생이 예산 차종가에 보관하던 영정 원본을 서울로 가져가 2본을 베껴 그리게 하여 3본이 전하는데, 1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1본은 수당 이남규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원본은 이 사당에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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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계 선생의 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오르니 깨끗이 정돈되고 소박함이 흐르는 선생의 묘는 부인 양주 조씨와의 합장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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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망


푸른 소나무 너머의 먼 세상을 바라보다가 가까이 당겨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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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임 선생 고택


기와집 한 채가 보이는데, 역시 소박한 분위기의 고택은 잠시 후에 들릴 이광임 선생의 고택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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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해 신도비


묘역에서 내려와 만나는 신도비는 아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819년 순조 때 세워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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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삼신도) 


신도비 옆의 연못은 아계 선생의 사위인 한음 이덕형(오성과 한음의 한음)이 풍수지리상, 묘의 위치를 보완하는 동시에 기의 흐름을 막기 위해 조성하였다고 하는데요,
선생이 생전에 연꽃을 좋아하여 연꽃을 심었고, 신선 세계를 동경하는 것을 기리어 삼신도(도가의 신선 사상에서 나오는 신선이 거처한다는 전설상의 장소)를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예산군 대술면 한산 이씨의 흔적을 찾아서 사진

▲ 안내판


아계 선생의 묘역 배치를 안내판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서 이광임 선생 고택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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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임 선생 고택과 정려


방산저수지를 따라 내려오니 이광임선생 고택과 아들 이승유의 정려가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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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임 선생 고택


이 고택은 아계 이산해의 9대손으로 조선 순조 때의 선비 이광임이 1820년에 지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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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택에서 바라본 아계 이산해 묘


옛집은 거의 남향(南向)으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200여 년 전 지어진 이 고택은 이광임 선생이 조상인 아계 선생을 그리워하며 정성을 다하였던 깊은 마음을 담아 동향(東向)으로 지었다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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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


동쪽으로 집을 틀어 묘를 향하게 했던 이광임 선생의 마음을 느껴 보고자 잠시 마루에 앉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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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


뒤틀려 세월을 실감케 하는 마루에서는 선생이 남기신 효심(孝心)이 살며시 묻어나는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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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판


마루에 걸린 현판의 정확한 의미는 아니지만, 현석(玄石, 자석)처럼 '조상에게 딱 달라붙어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은 산방(山房)이라는 의미로 선생이 품었던 효(孝)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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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유 정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승유)에게도 이어졌기에 1904년에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고 하는데,
아버지 이광임이 학질에 걸려 위독할 때 아들 이승유는 자신의 손에 상처를 내어 피로 아버지를 두 번이나 살렸고, 선생이 죽은 이후 아침저녁으로 산소를 찾아가 인사를 하였으며, 절을 하던 자리에는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하네요. <후손 수당 이남규의 문집 '수당집'에 이승유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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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긴 문


고택을 돌아보니 꽉 잠긴 문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바로, 문화재 도난 사건이 있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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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2005년 고택 안채에 있는 재실의 문짝인 '들어열개 형식의 4분합 빗살문'이 모두 없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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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다른 문짝이나 재실의 촛대, 놋향로 같은 작은 기물들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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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나무 두 그루


심지어 고택의 마당에 있던 향나무를 뽑아 놓고는 미쳐 가져가지 못했는지 그대로 마당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다시 심었지만 결국엔 고사하였고 지금은 고사목이 되어 그 맥을 잇고 있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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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임 선생 고택


고택을 보존하는 의미와 복원을 하였더라도 본연의 멋을 잃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겠지요.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수당 이남규 선생의 고택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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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산저수지


이곳 방산리에 한산 이씨가 세거하게 된 동기는 아계 이산해 선생이 생전에 자신의 묏자리를 예산 대술면 안골 천방산 아래에 정하면서 였다고 전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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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


그렇게 자신의 묏자리를 정했던 아계 이산해의 손자인 이구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부인 전주 이씨의 주도로 17세기 중반에 예산에 정착하였고, 1637년 조부 이산해의 묘소 인근에 집을 지으니, 지금의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이라 불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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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의 집 


수당 이남규 선생은 조선 말 학자이자 단재 신채호의 스승이기도 하며, 1906년 병오의병 당시 의병 민종식의 은신을 돕다가 이 일이 의병과 관련 있다고 하여, 1907년 투옥 중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와 함께 피살된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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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


400년의 세월을 이겨온 수당 고택은 명품 고택으로 잘 보존되어왔고, 고택 옆으로 수당기념관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한산 이씨의 흔적을 찾아보았는데, 작은 흔적 찾기가 생각 외로 커다란 흔적을 더듬게 되었답니다.
많은 자료를 접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참 고민도 많았던 글이었는데요, 조상에 대한 후손들의 진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음에, 방산리 한산 이씨의 확고한 뿌리를 드러내는 정도에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아계 이산해 묘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산7-1

이광임 선생 고택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344-5

이남규 선생 고택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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