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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 인물

충신

[최익현]([崔益鉉][면암(勉庵)]) [1833~1906]
최익현
생 애 :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6세 때 입학하여 9세 때 김기현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때 벽계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으며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 다. 1855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장령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여 여러 차례 귀양살이를 하였고, 1876 년 최익현은 나라에 글을 올려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에 반대하다가 다시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최익현은 1879년 귀양에서 풀 려 난 뒤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다 그 뒤 단발령 (상투를 없애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한 명령)에 반대하여 다시 옥살이를 하였다. 1898년 경기도 관찰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거절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이듬해에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과 충청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셨다.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 간 뒤, 일본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하여 단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업 적 : 수봉관ㆍ지방관ㆍ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ㆍ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 올려,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게 하였다. 구한 말 항일구국운동의 선봉이자 유림(儒林)의 최고봉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순국한 인물이다.
[최영][崔瑩] [1316~1388]
최영
생 애 : 1316년 고려 충숙왕 때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에서 태어나 16세 때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을 교훈 삼아 청렴 결백한 관리였다. 고려의 건국 이상인 옛 고구려 땅 만주 벌판을 되찾는데 노력하였으며 홍건적을 격파하고 1360년 남쪽 지방을 괴롭히는 왜구를 섬멸하고 1375년 홍산대첩(鴻山大捷)등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우왕은 장군에게 시중(侍中: 지금의 국무총리) 벼슬을 주고 전토와 노비를 상으로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73세(1388) 고령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을 맡았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우리의 북쪽 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자기의 땅이라고 하자, 장군은 팔도도통사가 되어 옛고구려 땅인 요동정벌 에 나섰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성계군이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고양)등지 에 유배되었다가 개경(開京)에서 참형(斬刑)되었다.
업 적 : 홍건적이 쳐들어와 서경이 함락되자 이를 무찌르고 수복하였고, 다시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역시 이를 격퇴하여 수도를 수복하였다. 홍산대첩에서 왜구를 섬멸한 것을 비롯하여 수십차례에 걸쳐 왜구를 무찌르고 국내의 대소 반란 토벌 등 80여 회나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공민왕 4년에는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원나라의 횡포와 국내의 혼란으로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았고, 신흥 명나라가 철령이북 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
[이개]([李塏][백옥헌(白玉軒)]) [1417~1456]
이개
생 애 : 중추원사 종선(種善)의 손자이고, 계주(季疇)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風)이 있었다.1436년(세 종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41년에 집현전 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明皇誡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 한글) 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사(賞賜)를 받았다. 1447년 9월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 여하였고,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 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하여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ㆍ빈(賓) 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그는 좌문학(左文學)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進講)하였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 달라는 간곡 한 부탁을 받았다. 1456년(세조 2) 2월에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6월에 성균관사에 김질의 고변에 의하여 성 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되어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발각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이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 하였다고 한다.
업 적 : 조정에 사창(社倉)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고 세종 때 집현전에서 박팽년, 성상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다. 단종 때의 충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성삼문]([成三問][매죽헌(梅竹軒)]) [1418~1456]
성삼문
생 애 : 1418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438년(세종 20)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수찬(修撰)ㆍ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올라갔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 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에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박팽년(朴彭年)ㆍ신숙주(申叔舟)ㆍ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 며,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 를 연구해와서 1446년 9월 2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에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 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靖難功臣)3등의 칭호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세조 임금이 된 후 단종을 왕위에 복위시키는 역모를 꾀하다 38세로 장열한 최후를 맞는다.
업 적 : 성삼문은 집현전의 중추적인 학자로서 훈민정음 창제와 『동국정운(東國正韻)』같은 책의 편찬에 노력을 기울였다. 성삼문은 충절과 절개 를 성삼문은 사육신(死六臣)으로서 높이 추앙될 뿐만 아니라, 조선역사에서 언관으로서 굳건한 지조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박팽년]([朴彭年][취금헌(醉琴軒)]) [1417~1456]
생 애 : 이조판서 박중림의 아들로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 학사를 거쳐 1438년 사가독서를 했 고,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 종 때 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고, 이들 학사들 중에서 경술(經術)과 문 장ㆍ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그 울분으로 자살하려 하였으나 성삼문(成三問)의 만류로 단념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고, 1456년(세조2) 다시 형조참판으로 성삼문, 하위지, 이기, 류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사형되었다.
업 적 : 문화창조 발전에 기여한 지식계층으로 집현전 학사로서 노력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글씨에《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이 있다. 나라의 대통을 바로 이어가기 위해 절개를 지켜 의롭게 죽은 사육신 중 한 분이다.
박팽년
[계백][階伯] [?~660]
계백
생 애 : 본명은 승이고 백제 말의 용감한 장수이자 충신으로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달솔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백 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던 660년, 김유신과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 지금 의 대전 동쪽 마도령)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黃山: 지금의 연산)벌에 나가 5만여 신 라군을 맞이하였다. 계백은 백제의 위태로움을 미리 알아차리고 출전에 앞서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 다" 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이고 싸움에 임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결국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나라를 위 한 계백의 충성심과 용맹성은 후세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교훈이 되고 있다.
업 적 :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 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 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황산벌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김종서]([金宗瑞][절재(節齋)]) [1383~1453]
김종서
생 애 : 김종서는 고려 말 1383년 충남 공주에서 김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그 의 인물됨을 알아본 것은 세종이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여러 벼슬을 맡았다. 북방 오랑캐들의 침입이 잦 자, 김종서는 1433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오랑캐를 물리치고 북방을 개척했다. 이후 7년 동안 회령, 경흥, 종성, 온성, 경 원, 부령에 육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함경도 병마도절제사를 맡아 오랑캐의 정세를 탐지 하여 그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그 후 세종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진 김종서는 형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1449년~1452년에 걸쳐 고려의 역사를 정리 편찬하는 작업을 하였다. 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단종이 12세 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그는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황보인 등과 함께 어린 왕을 충심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1453년 왕위를 찬탈하고자 계유정변을 일으킨 수양대군에게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업 적 : 그는 육진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로서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ㆍ엄정하고 밝은 문인ㆍ학자였으며, 유능 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왕명을 받아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를 다시 간행하는 작업에 착수하였고 『고려사』를 완성하였으며 새로 편찬 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고려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다시 정리하여 편찬할 것을 건의해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또 『세종실록』편찬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세종실록』편찬에 힘썼다. 또 북쪽 오랑캐를 무찌르고 우리 나라의 영토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국경의 방비를 철저히 한 명장이었다.
[이순신]([李舜臣][충무(忠武)]) [1545~1598]
이순신
생 애 : 154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ㆍ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내고 1586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 때는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정죄(定罪)하려 하자 그 원인이 첨병(添兵)을 거절한 데 있다 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끝내 주장하다 중형은 면했으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길에 올랐다. 1589년(선조 22) 선전관 ㆍ정읍 현감(井邑縣監) 등 미관말직(微官末職)만 을 지내다가 91년(선조 24)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折衝將軍) ㆍ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같은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승진, 좌수영(左水營:麗水)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임진왜란 중에 각종 해전에서 대승 을 거두며 승전보를 전하던 중 1597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 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鳴梁)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 다. 다음해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混戰)중 유탄에 맞아 54세의 일기로 전사하였다.
업 적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에서도 승리하였으며,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 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 ㆍ난민구제 ㆍ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 장군의 고안으로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鐵甲戰船)인 거북선을 만들기도 하였다.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또한 격퇴시켰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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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17-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