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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부여 역사 강연을 통해 향교의 교육 기능을 계승하고 있는 홍산 향교

2023.09.07(목) 21:45:46충화댁(och0290@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사진

향교란 고려와 조선의 지방 교육 기관을 말한다. 교육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2가지 역할을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세웠고 향교는 유학의 산실이었다. 향교의 재정은 지방행정에서 직접 관리했다. 지방에서 학문이 높고 덕망이 있는 선비들은 향교에서 수학을 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해 중앙으로 진출하는 조선의 공교육 기관이었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과 유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는 명륜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무와 서무 등의 구조로 이루어졌다.  

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사진

21세기의 향교는 교육적인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분향제를 지내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봄과 가을에는 지내는 석전제는 조선왕조 5백년과 현재까지 우리 정신문화의 근간인 유교 이념에 대한 명맥을 유지하려는 차원이다. 공자와 유교 성현들은 사람 사는 세상에는 예의와 도리를 갖추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천했다.

부여에서는 임천향교에서 시작한 문화를 통한 지역을 살리고 '공부하는 명륜당' 이라는 주제로 부여향교에 이어 홍산향교에서도 역사 강연을 시작했다. 조선의 유생들이 향교에 모여 유학을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를 했다면 21세기 현대판 유림들은 역사 공부를 하기로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의식으로 지역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알아가기로 했다.

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사진

부여 향토 사학자 이진현 선생은 조선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자칫 지루하기 쉬운 역사 강의를 알기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게 풀어준다. 그는 특히 조선 역사 속에서 부여에서 움직였던 사람과 사건에 대해 검증된 자료와 현장 답사 등을 통해 명쾌하고 재미있게 표현하는데 탁월하다. 
한 가문의 족보와 묘비까지 들여다 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연구한 자료를 문중에 제공해주고 비문이나 문화재 속에 언급된 조상들의 업적을 찾아주기도 한다. 

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사진

조선 전기는 유교 이념으로 정권이 안정되고 유생들의 의식이 충만할 때였다. 
서림 이씨 가문의 이흥의(1492~?)는 단종 때에 부여 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충신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무장한 전형적인 선비였다. 비록 지방 현감으로 재임하며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처지였으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기개가 있는 분이었다. 단종을 폐위하고 임금에 오른 수양대군을 패륜으로 규정하고 세조를 돕는데 활약한 처남 홍윤성을 국정 농단으로 여겨 비분강개했던 그는 과감하게 현감직을 사직하고 부여로 낙향했다.
대세는 세조의 세상으로 기울고 서림 이씨 가문의 이흥의는 고향 부여로 돌아와 은거할 수 밖에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역사 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때 낙향했던 선비 이흥의가 부여에 남긴 자손들은 부여군 남면 호암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다. 
 부여 구룡면 금사리에 있는 독락정. 대쪽 선비 이흥의가 후학을 양성하고 김시습과 교류했던 정자
▲ 부여 구룡면 금사리에 있는 독락정. 대쪽 선비 이흥의가 후학을 양성하고 김시습과 교류했던 정자

같은 시기에 부여에는 서림 이씨 이흥의와 같은 생각으로 외산 무량사로 숨어 든 김시습이 있었다. 
당대 천재 문장가인 김시습과 대쪽 같은 절개를 지닌 이흥의는 부여 구룡면 금사리에 독락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교류하며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 김시습은 저서와 행적 등이 기록이 있어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으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흥의는 서림 이씨 문중에서만 이름이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벼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홀로 공부하며 즐긴다는 선비의 기상을 반영한 '독락정'은 조선 전기의 선비 이흥의의 흔적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부여 향토사학자 이진현 선생은 부여에 부임했던 현감들의 기록을 찾아 연구하면서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의 행적을 발견했고 그에 대해 탐구했다. 그 결과 자손들이 부여에서 여전히 일가를 이루고 번창해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홍산 향교 강의는 승자의 역사 속에 가려진 대쪽 선비이며 낙향 선비인 이흥의의 흔적을 따라가며 홍산에서 서 족적을 남긴 조선의 충신들의 행적도 함께 살펴보았다 

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사진

부여 곳곳에 남아있는 문화재를 찾아 그 유래를 밝히고 관련 역사에 대해 묵묵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진현 선생은 부여 현감이었으며 대쪽 선비의 기질을 지닌 서림 이씨 부여공파 입향조 이흥의를 독락정에서 찾아냈다. 
세조의 세상에서 세조를 거부하고 단종을 오직 섬겨야할 임금으로 여겼던 이흥의의 입지는 좁을 수 밖에 없었다. 시를 지어도 이름을 걸고 남길 수 없었을 것이고 생전에 항상 관아의 감시의 대상으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주류 역사를 벗어난 지역의 역사는 지역 사람들이 챙겨야 한다. 그런 의미로 부여의 3개 향교에서는 지역의 소소한 역사를 찾아 공부하자는 바람이 일고 있다.

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사진
▲ 홍산 향교에서 역사 강연에 집중하는 유림들

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사진

수양대군을 세조로 등극시킨 일등공신으로 재상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있던 처남 홍윤성과 달리 공직을 버리고 부여에 은거했던 이흥의의 절개는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다. 서림 이씨 문중에서는 선조의 그런 곧은 절개에 대해 언급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현재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에 대한 대접이 시원치 않은 것처럼 현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인사의 삶이란 고달팠을 것이고 자손들의 삶도 녹록치 않았을 테니까. 
 
부여군 구룡면 동방리에 있는 대쪽 선비 이흥의의 묘
▲ 부여군 구룡면 동방리에 있는 대쪽 선비 이흥의의 묘

세조를 인정하지 않은 대쪽 선비 서림 이씨 이흥의를 부여 홍산 향교 유림들이 역사에서 소환하다. 사진

조선 전기 전형적인 묘지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이흥의의 묘에는 연잎을 엎어놓은 모양의 하엽형 묘비가 여전히 남아있다. 당시 세조의 정권에서 권세를 누린 처남 홍윤성의 묘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은 문인석 두 기가 남아있다. 작금의 세상도 세조의 하늘과 다르지 않다는 듯 문인석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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