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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2022.08.30(화) 05:26:19젊은태양(claudi00@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충남 지역을 다니면서 이 지역에 유난히 국가에 공헌하거나 독립운동에 자신의 삶을 바친 인물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천안에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가 있고, 어디에서나 유관순 열사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이곳은 천안시 유관순열사 사적지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공원입니다. '열사의 거리'라고 이름 붙인 이 작은 공원은 '독립만세운동을 후손에게 기리기 위해 다양한 상징 조형물과 함께 어우러진 휴식 공간으로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나라 사랑의 정신과 순국선열의 고귀한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한 거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상징 조형물은, 도로 중앙의 원형 로터리에 있는 '새천년의 상'(임정혁 작가), 로터리 입구에 있는 '새천년의 꿈'(김근배 작가), 열사의 거리 중간에 있는 '태극'(윤성길 작가), 유관순열사기념관 진입 부분에 있는 '희망의 물결'(현남주 작가) 조형물이 그것으로, 모두 열사의 거리를 조성하면서 작가가 만든 작품입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이런 상징 조형물도 멋지지만,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천안의 역사와 아우내 장터와 그곳의 만세운동, 그리고 천안 출신 인물들을 소개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들은 공원에 자유로운 형태로 벽을 세우고 그 벽에 전시했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천안시 연혁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과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안이란 의미가 '하늘 아랴 가장 편안한 곳'이라고 하는데, 이 지명은 고려 태조가 통일을 이루기 전에 태조산에 올라 도솔의 지세를 살펴보며 내린 명칭이라고 합니다. 천안에 태조산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군요~!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삼국시대에는 군사 요새라는 의미로 '도살성'이었다가 고려 태조 13년에 천안도독부가 설치됐습니다. 조선 태종 때 잠시 영산군이었다가 다시 천안군이 되었고, 천안읍이 발전하면서 1963년 1월 1일에 천안시로 승격됐으며 1995년 5월 10일에 천안군과 통합됐다고 합니다.

천안을 말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 '천안 삼거리 능수버들'입니다. 천안 삼거리에는 '능소'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박현수 선비의 전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능소 아버지가 꽂아놓은 버드나무 지팡이가 뿌리를 내리고 버드나무로 자랐고, 박현수 선비가 능소를 위해 지은 시조가 '흥타령'이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아우내 봉화제는 아우내 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유관순 열사와 애국선열의 뜻을 알리고 계승하기 위해 매년 2월 말일에 개최하는 전국 최대의 3.1운동 기념행사'라고 합니다.[자료출처 : 안내판에서]

아우내는 현재 한자어로 병천(竝川)이라고 쓰게 됐는데, '시내를 아우른다'는 의미입니다. 아우내 장은 1일과 6일에 열리는데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1929년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가 조상의 묘 앞에 아우내 시장을 열었다고 합니다. 박문수가 살았던 시기로 미루어보면 아우내 시장은 18세기 초·중반부터 열렸던 것으로 예상합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팔던 순대국밥이 유명해지면서 순대 속에 잡채가 아닌 채소와 선지를 넣어 판매한 것이 입소문이 나면서 '병천순대'로 자리 잡았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아우내 장터에 장이 서면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이 선 날 유관순 열사와 열사의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주민 등 3,000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 만세운동이었는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19명이 순직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아우내 장터에서 구국동지회 이름으로 뿌려진 독립선언서에는 '13도 2천만 민중'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지금은 남북한 합해서 인구가 7천만 정도 되니까 중간에 6·25전쟁을 겪었는데도 100년 사이에 인구가 많이 늘었네요. '잃었던 국토를 다시 찾자'는 결의와 함께 '두 주먹 힘차게 쥐고 화살 같이 모이라'는 말이 화살처럼 다가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1702년(숙종 35)에 충무공 시호를 받은 김시민(1554~1592) 장군과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도 아우내 출신 인물입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1591년에 진주 판관이 되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크게 물리친 공로로 7월에 진주목사가 됐는데,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로 인정받았습니다. 전투에 승리하고 성안을 순회검사 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놈이 쏜 총을 맞고 그로 인해 며칠 뒤 순국했다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천안 장산리 출신인 홍대용(1731~1783)은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분으로, 실학 정신을 제시하고 신분제도를 타파하여 능력에 따라 직무를 주는 사회제도를 추구하였고, 지구자전설을 자장하고 서양 과학과 수학도 적극적으로 공부하고 저술했습니다. 앞선 사상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동녕(1869~1940) 선생은 천안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고, 1897년에는 독립협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국민계몽 운동을 전개하고 을사늑약 철회 연좌시위도 했으며 결국 나라를 떠나 북간도에서 한국인 최초의 학교인 '서전의숙'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초대 의장을 역임했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입구 열사의 거리에서 만난 천안의 인물들 사진

조병옥(1894~1960) 박사는 천안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공주 영명학교, 숭실 중학교, 연희전문을 거쳐 1914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철학박사(1925)를 받았는데, 서재필, 이승만 등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 시대에 경무국장도 했고, 1960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때 신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받다가 사망했습니다. 

황혜성(1920~2006)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여학교 교사를 하다가 1942년에 조선 최후의 주방 상궁 한희순에게 궁중음식을 전수받고 1946~1990년까지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일을 하며 궁중음식을 알리는 데 노력했습니다. 이 공원에 기록된 인물 중에 가장 편안하고 상대적으로 굴곡 없는 삶을 살며 천수를 다하신 듯합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조선의 근현대사를 압축한 역사를 읽어본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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