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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연구시설’ 위장에 분노한 주민 1만 5000명 경찰과 충돌

격동의 충남 100년 - 안면도 방폐장 소요사태

2023.12.07(목) 23:23:09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1990년 11월 안면도 방사성폐기물처리시설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기사가 담긴 지역신문사 지면.                /태안신문

▲ 1990년 11월 안면도 방사성폐기물처리시설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기사가 담긴 지역신문사 지면. /태안신문


1990년 11월 안면도 방폐장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모습.                                      /태안신문

▲ 1990년 11월 안면도 방폐장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모습. /태안신문



1990년 11월 8일 안면도 연륙교 차단 
경찰 지서 전소 소방서·읍사무소도 점거

경찰차 파손됐으나 무기고는 안 건드려
과기처 장관·충남경찰국장 인사 조치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과기처 장관으로 임명된 정근모 박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물리학자였으며 IAEA(세계원자력기구)의장을 지낼 만큼 원자력 권위자였다.

또한 장관 재임 때 KAIST를 설립하는 등 우리 나라 과학계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런데 정 박사가 1990년 3월 장관에 취임하면서 제일 먼저 직면한 문제는 방폐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핵폐기물을 저장하는 방폐장. 그러나 어느 지방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9년 경북 영덕과 울진에 방폐장을 세우려 했으나 주민들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다음 후보지로 등장한 것이 충남 안면도. 

그런데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서해과학연구단지’를 건설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철저한 보안속에 방폐장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비밀은 끝내 밝혀지기 마련. 어느 날 갑자기 안면도에 방폐장이 추진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안면도 주민들이 발칵 뒤집혔다. 

여기에 반핵단체까지 가세함으로써 안면도 방폐장 문제는 전국적인 이슈로 번져 나갔다. 이런 가운데 안면도 주민 대표들이 모여 반대투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부는 물론 직접 연관이 있는 원자력연구원이 총동원되어 주민 설득에 나섰다. 한 번은 우리나라 원자력계의 권위자인 C박사와 K박사가 투쟁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안면도로 왔다. 

그리고는 거룻배를 빌려 타고 투쟁위원장이 작업을 하고 있는 가두리 양식장으로 향했다. 

연구시설위장에분노한주민1만5000명경찰과충돌 1


박사들은 위원장에게 자신들이 원자력 연구원에서 왔다고 신분을 밝히고 대화를 하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위원장은 ‘원자력…’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박사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고 방폐장의 안전성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했다. 

투쟁위원장은 나약해 보이는 박사들을 심리적으로 위압해 보려고 큰 사발 세 개에 독한 막소주를 가득 부어 놓고는 이것을 “우리 똑같이 마시자. 그러면 대화를 하겠다”고 제안했다. 

위원장이 단숨에 소주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술을 전혀 못하는 박사들은 진퇴양난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돌아설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낸 박사들은 소주 사발을 비웠다.

이렇게 하여 양측이 대화를 하기로 하고 어항으로 향해 배를 저었다.

그러나 도중에 C박사가 술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뒤틀다 그만 바다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바다에 빠진 C박사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살려 달라’고 외쳤다. 

이 모습을 본 위원장이 재빨리 물로 뛰어들어 C박사를 구해 냈다. 그래도 C박사는 의식을 잃고 있어 어항에 내리자마자 동네 이장 집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받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투쟁위원회 소속 청년들이 달려와 ‘방폐장 결사반대’를 외치며 험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투쟁위원장이 흥분한 청년들을 달래며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박사들은 대화 한번 못하고 안면도를 떠나야 했다.

그런데 11월 8일 대국민 설득을 위해 당국에서 안면도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주민들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미 안면도의 각급 학교는 등교거부 운동으로 텅 비어있는 등 분위기가 심상찮은 데다 주민들은 육지와 안면도를 연결하는 연륙교에 바리게이트를 쌓아 모든 차량의 통행 출입을 차단했다. 

그러자 11월 8일 오후 5시, 육지에서 경찰이 출동하여 바리게이트 철거작업을 강행하고 섬 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11월 8일 어둠이 시작되면서 주민들 1만5000명이 집결하기 시작했고 ‘방폐장 결사반대’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들이 행진을 계속했다. 

이어 시위대와 경찰의 몸싸움이 시작됐고 여기 저기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가운데 오후 7시 46분에는 안면도 지서가 화염에 휩싸였고 읍사무소와 의용소방대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일부 경찰차도 파손되었으나 지서의 무기고는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결국 이날 자정이 되어 사태는 진압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오래 계속되었다. 주민 7명이 구속되었으며 이 날자로 정근모 과기처장관이 물러났고 김영두 충남경찰국장도 인사조치 됐다.

정근모 장관은 이 사태에 매우 마음 아파했으며 책임감도 크게 느껴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1994년 노태우 대통령은 그를 다시 불러 과기처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만큼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정치에 뛰어들어 새 정당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9명 후보중 9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1990년 11월 7일 안면도 방사성폐기물처리시설 건설에 반대하는 안면도 주민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충청투데이

▲ 1990년 11월 7일 안면도 방사성폐기물처리시설 건설에 반대하는 안면도 주민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충청투데이



그 후 2003년 과기처와 원자력연구원은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 방폐장을 설립하려 했으나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완강한 거부로 또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를 추진했던 김종규 부안군수는 주민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해 입원해야 했으며 경찰과 주민 50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폭력사태로 이어 졌다.

그 이후 아직도 방폐장 건설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말 국가적으로 절실한 문제가 아직도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경주에 12만 드럼을 처리할 수 있는 저준위 폐기물 처리장은 있으나 문제는 고준위방폐물이다. 정부는 1조 4000억원을 들여 고준위방폐물 처리장 부지를 선정하고 2060년까지 영구처분시설 관련 기술을 개발한다는 계획인데 이 계획이 순탄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할 뿐이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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