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문화·역사

누가 이 다리(橋)의 이름을 모르시나요?

오기된 옛 지명을 바로잡아야 한다.

2023.10.31(화) 17:30:05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인문학 강의를 수강하러 갔더니, 강사는 모두(冒頭)에 "우리나라 지명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토지조사(일본은 1914년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을 개편했다)를 하면서 지명이 왜곡된 곳이 많다."라고 한다. 강사의 이야기를 듣자, 여름내 풀지 못한 숙제가 떠올랐다.

왕촌천

▲ 공주시 상왕동을 흐르는 왕촌천 풍경


지난여름, 지인과 공주시의 왕촌천을 둘러본 일이 있다. 왕촌천(旺村川)은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에서 발원하여 내흥리를 지나 상왕동에서 금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왕

▲ 왕촌천 풍경


지인과 둘러본 왕촌천은 공주시에 속하는 법정동인 '상왕동(上旺洞)'을 지나는 구간이었다. 상왕동은 옛날 계룡산 끝, 용의 꼬리에 해당한다. 위는 넓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좁아서 유속이 왕성하여 왕천(旺川) 또는 왕골(旺谷)이라 했으며, 왕골의 위쪽에 해당하여 위왕촌 또는 상왕이라 했다고 전한다.

상왕 제1교

▲ 상왕 1교
 

상왕 제1교

▲ 상왕 2교의 경우, 현재 이용 중인 다리가 놓이면서 엄지기둥만 남아 있는 상태다.
 

오야교

▲ 1979년 착공하여 1983년 완공한 오야교는 공주와 대전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1

▲ 왕촌천에는 가설된 연도를 알 수 없는 보도교(?)가 놓여 있다.
 

왕촌천

▲ 오야동교(구교)에서 바라본 오야교(신교)와 금강 8정의 하나인 '벽허정'
 

공주-대전 도로

▲ 공주-대전 간 도로(시도 21호)
 

공주- 대전 도로변의 버스정류장

▲ 공주- 대전 도로변의 버스정류장


상왕동을 지나는 왕촌천에는 상류 쪽에서부터 상왕 제5교-상왕4교-하왕촌교-상왕3교-상왕2교-상왕1교-오야교 순으로 7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1988년에 완공된 하왕촌교와 1983년 완공된 공주-대전 간 도로(시도 21호) 위에 놓인 오야교를 제외하면 5개의 다리는 1988년에 놓인 다리들이다. 그리고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오야동교(吾也洞橋)가 가설돼 있어, 왕촌천에는 총 8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오야동교는 오야교가 놓이기 전 이용되던 다리로 동네 사람들은 '구다리(묵은 다리) 혹은 왕촌다리'라고 부르며, 새로 놓인 오야교는 '신다리'라 부르며 구분 짓고 있다.
 

1

▲ 소학동-상왕동의 구길에는 오야동교(吾也洞橋)가 놓여 있다. 마을에 버스가 다니면서 버스정류장도 있었다고 한다.공주-대전 도로(시도 21호)가 나면서 현재는 이용자가 드물다.
 

1

▲ 소학동에서 상왕동으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오야동교'
 

1

▲ 소학동-상왕동 방면의 오야동교 엄지기둥에는 한자로 쓴 '오야동'이라는 교량 이름이 적혀 있다.
 

1

▲ 소학동-상왕동 방면의 구길에는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 준공 날짜(단기)가 적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촌천 탐방에 동행했던 지인으로부터 뜻밖의 정보를 듣게 된다. 지인이 조사한 바로는 '오야동교'는 '와야동교(瓦也洞橋)'라고 불렸으며, 와야동은 공주시 소학동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또한 공주시의 지명유래에 의하면 와야동은 왯골, 와야골이라고도 불렸으며, 왯골은 백제 때 기와를 구운 가마골에서 유래한 것으로, 훗날 기와의 한자말이 와(瓦)이므로 와야골이 왯골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지인은 2018년 D 일보에 실린 최초의 을미의병, '유성의병'에 대한 기사도 공유해 주었다. D 일보에서는 공주시 와야동은 문석봉을 비롯한 유성의병이 전투를 벌인 유일한 장소로, 전투지 근처에는 '와야교'란 옛 다리가 남아 있어 와야동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독립기념관에서 제공했다는 사진 2장을 살피니, 익히 알고 있는 왕촌천의 바로 그 '오야동교'였다.


지인이 제공한 정보에 이런저런 의문이 생겨 반론을 제기하니, 지인은 88세 되신 상왕동 토박이 어르신을 직접 찾아뵙고 다시 새로운 정보를 찾아왔다. 현재의 오야동교가 있던 자리에 맨 처음 생긴 다리는 일제강점기에 놓였으며, 한국전쟁 때 반파됐다는 것이다. 이후 1955년에 새로 다리를 놓게 되는데, 이때 기존에 있던 와야동교의 엄지기둥은 왕촌천에 내버려지고 무슨 연유에선지 '오야동교'라는 교명이 붙여졌고, 현재는 '오야동교'라는 엄지기둥이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1

▲ 상왕동에서 소학동으로 이동하며 바라본 '오야동교' 전경
 

1

상왕동-소학동 방면의 구길에 놓인 오야동교의 엄지기둥 1
 

1

▲  상왕동-소학동 방면의 구길에 놓인 오야동교의 엄지기둥 2
 

1

▲ 오야동교 교각의 높이를 봤을 때, 왕촌천의 유량이 많아지면 이웃 마을로의 왕래는 어려워 보인다.


지인이 발품 팔아 알아 온 귀한 정보를 듣고 났는데, 의문점이 풀리기는커녕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겨났다. 한마을의 대사(大事)라 할 수 있는 교량을 새로 놓으면서 소학동과 상왕동이라는 두 마을은 물론이고 공주시의 그 누구도 잘못된 다리 이름을 바로잡지 않은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다.


게다가 1970년대 초, 공주시 계룡면 내흥리에 소재한 왕흥국민학교로 첫 발령을 받은 선생님 한 분의 인터뷰는 혼란을 가중했다. 인터뷰이(interviewee)인 선생님은 내흥리까지 가는 
버스가 없던 시절에 공주읍에서 통근하기 위해 자전거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학동-상왕동 구길을 지나 현재의 오야동교를 건너야 했다고 하며, 수없이 그 다리를 건넌 선생님 기억에 1970년대만 해도 엄지기둥에 새겨진 다리 이름은 와야동교였다고 한다. 1955년 다리를 새로 놓으며 '와야동교'라고 적힌 엄지기둥이 왕촌천에 버려졌다고 인터뷰해 주신 88세 어르신의 말씀과는 상이한 부분이 있다.

5

▲ 멋스러운 오야동교에서 본 왕촌천 


기와 와(瓦) 자가 나 오(吾) 자로 오기가 됐는지 아직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 때문에 오야동교가 맞는지, 와야동교가 맞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둘 다 맞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공주시에 오래 거주한 분들은 왕촌 구길에 놓인 '오야동교'를 '와야동교(와야교)'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수수께끼투성이이지만, 오야동교는 공주시의 법정동인 소학동과 상왕동을 이어주는 고마운 다리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비단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바로잡지 않은 옛 지명을 사용하는 예를 1955년 왕촌천에 놓인 '오야동교'에서 엿본 듯하다. 상왕 2교에서 보듯 요즘 가설되는 다리에는 교명이나 준공 연도 등이 적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름내 해결하지 못한 숙제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완의 숙제를 해나가며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교량에는 한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기는 만큼 의미 있는 이름을 꼭 부여했으면 하고, 잘못된 교량의 이름은 검증 절차를 거쳐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엥선생 깡언니님의 다른 기사 보기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엥선생 깡언니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