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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서울과 같은 한자를 쓰는 서산의 옛 이름 서령군의 역사

2023.10.02(월) 19:45:38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여인들이 공물처럼 끌려가고 모든 것이 다른 나라의 복색으로 살아가던 그때에 공민왕은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다. 나라는 점차로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공민왕은 반원과 함께 개혁을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임금만의 노력으로는 쉽지가 않았다. 고려의 마지막에 불꽃과 같은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설계한 사람은 바로 류숙(柳淑)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공민왕의 스승이며 장자방의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훗날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의 스승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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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서산시청의 앞에는 옛날 서산의 이름을 기억하는 관아문이 있다. 서령군문이 바로 그것이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 모양의 주춧돌이 배치되어 있으며 1979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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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서산은 중심지가 되던 곳이다. 류숙은 바로 이곳에서 1316년 서주군(瑞州郡, 지금의 서산시) 삼봉리(三峰理) 출생하였다. 서주라고 불렸을 만큼 서해안의 행정중심지였던 곳이다. 류숙(柳淑)을 중심으로 하는 수종공신(隨從功臣) 세력이며 류숙(柳淑)과 김득배(金得培)는 과거에 급제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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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규모만 보아도 당시 이곳의 건물들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전에는 풍악루라고 불렸다가 1867년(고종 4년)에 당시 서산군수로 있던 오병선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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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 친원파인 기황후의 오빠 기철 일당을 제거하고 내정간섭을 일삼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파(破)하였으며 인당(印?)으로 하여금 요동의 일부의 성을 공격하여 회복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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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이라는 지역은 부임을 해서 일을 했던 충무공 이순신이나 유배를 왔던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도 있지만 가장 먼저 자신의 가문을 일으키기도 했던 류숙이 있다. 1361년 홍건적이 20만이 고려를 침공하여 고려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공민왕을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신시키고 군사를 정비해 총병관 정세운(鄭世雲)과 김득배(金得培),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등으로 하여금 개경으로 진격해 홍건적을 완전히 물리치게 함으로써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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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라고 불렸던 곳은 큰 공을 세우면서 류숙(柳淑)이 봉군(封君)을 서령군(瑞寧君, 현 서산시의 옛 이름)으로 하사 받으면서 시작되게 된다. 서령류 씨라고도 하고 서산류 씨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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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류 씨는 서산과 적지 않게 많은 접점이 있다. 서산에서 유명한 유방택 천문대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별축제가 열리고 있다. 류숙(柳淑)의 종제(從弟) 류방택은 조선창업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국내에서 발견한 소행성에 그의 이름이 붙여지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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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고목들이 서산시청과 서령군문의 앞에 굳건히 자리를 하고 있다. 그렇게 류숙은 가문을 명문으로 성장하게 하였으나 신돈(辛旽)이 등장하고 간교한 속임수를 쓰면서 관직에서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신돈의 모함으로 장류(杖流)되고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가 1368년 신돈이 보낸 자객에게 유배지 영광에서 교살당하였다. 후에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 그는 다시 복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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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지도는 사람의 이야기이며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연결점에 있기도 하다. 서산의 서는 상서서(瑞)를 사용하는데 서광이 비친다던가 상서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할 때 사용한다. 서울의 서도 상서로울 서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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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숙이 서령류씨의 시조가 아니지만 그를 대표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가문을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을 올리고 오래 버틸 수가 있듯이 모든 것의 기반은 가장 시간이 걸리고 신중해야 한다. 오래된 옛 흔적인 서령군문에서 잠시 서산의 사람지도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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