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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김한신, 화순옹주, 추사 김정희의 흔적을 찾아보는 예산여행

2023.10.01(일) 11:57:06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과시하지 않고 편하게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남자는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를 두었지만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홀로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그렁 행실 덕분인지 그와 성향이 비슷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숙종대에 태어난 옹주로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정빈 이 씨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지만 언니인 화억옹주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녀로 자라난다. 한 살 위의 오빠인 효장세자와 함께 영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게 된다. 효장세자는 훗날 태어난 사도세자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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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년(영조 8년), 영조와 정빈 이 씨의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혼인한 사람은 김한신이라는 사람으로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지만 여전히 행실에 큰 변화 없이 평범하게 지냈다. 그가 지은 집이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서 살았던 예산의 추사고택이다. 화순옹주는 김한신과 혼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와 증조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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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ㄱ자로 몸을 틀어서 맞이하는 건물이 바로 사랑채다. 한쪽을 추녀를 살짝 올린 팔작지붕이고  다른 한쪽은 주변의 산세를 반영한 듯 평평한 맞배지붕으로 만들어두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것을 염두에 둔 듯 개방감이 드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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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신의 품격 때문이었을까. 화순옹주는 그를 매우 사랑했던 모양이다. 김한신은 정도를 지키면서 살았지만 그의 생은 짧기만 했다. 1758년(영조 34년) 1월 4일 사망하였는데 그때의 나이가 39살이었다고 한다. 영조는 슬퍼하며 장례에 사용하는 물품을 모두 아끼지 않고 지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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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오갔을 고택에서 화순옹주는 김한신이 죽고 나서 곡기를 끊어버린다. 아들인 효장세자도 죽고 이어 낳은 사도세자까지 자신의 마음대로 안되었던 영조는 화순옹주에게 제발 식사를 하라고 명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비록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을지라도 결심한 바가 이미 굳어졌으니, 차마 목에 넘어가지 아니합니다.’라며 고집을 지킨다. 어버이의 뜻에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았음에 영조는 화를 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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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은 곳곳에 다양한 볼거리와 글귀가 있어서 머물면서 볼만한 곳이다. 담장이 언덕을 따라 차분하게 올라서면서 사당으로 이어지고, 뒷마당에 나란히 선 사랑채와 안채의 벽과 창호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겨진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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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방 안에서 머물면서 화순옹주의 마지막을 생각해 본다. 그녀는 남편이었던 김한신을 10여 일 만에 따라간다. 사랑에 따라서 자신의 명을 단축시킨 것이었다. 이에 예조판서 이익정이 옹주의 절의를 기리고자 정려(旌閭) 할 것을 청하자, 부인으로서의 정절을 지켰다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불효하였므로 도리에 어긋난다며 영조는 청을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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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는 부모에게는 불효를 먼저 떠나간 연인이자 남편에게는 사랑을 지켰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며 열녀정문을 세웠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남편 김한신과 합장되어 있으며 옹주의 열녀정문인 유형문화재 제45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또한 이곳에 있다. 김한신과 화순옹주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는데 맏형에게 양자를 부탁해 김이주를 양자로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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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주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김노경이며 그의 아들이 추사 김정희다. 공간이 확 트인 공간을 지나 위로 올라오면 사당이 있는데 사당 안에는 추사의 영정을 모셔 놓아, 추사를 찾는 이들이 사당에서 그를 추억하게 배려하고 있다. 추사 고택에는  '石年(석년)'이라고 쓰여 있는 돌기둥이 있다. 돌과 시간을 같이 표현해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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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라던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선대와 같이 집안의 양자로 보내지게 되는데 그때의 나이가 8살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곳에서 살기 시작했지만 양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난다. 그가 나중에 그린 세한도는 추운 겨울, 한기 서린 한 그루 소나무로 그려진 그의 고독한 삶이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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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기둥마다 온통 주련이 걸려 있는데 그렇게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았던가. 추사 김정희는 오랜 유배 생활을 했다. 그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었으며 자형의 변화가 무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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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문으로 나오면 옛날에 사용했을 우물이 있다. 김정희는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올랐으나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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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고택의 뒷마당에 심어진 모과가 익어가고 있다. 은은한 향이 모과의 매력이다. 매력적인 글감은 오히려 글로 풀어쓰게 되면 처음보다 덜 흥미로워질 때가 많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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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고택에서 약간만 위쪽으로 오면 화순옹주의 열녀정문인 화순옹주홍문이 나온다. 그녀는 사후에 남편인 김한신과 합장이 되었는데 위쪽에 묘가 자리하고 있다.  愛(애), 戀(연)이 사랑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사랑은 생각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무언가를 몹시 아껴 깊이 헤아리게 될 수 있는 그런 미묘함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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