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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석오 이동녕”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을 선포하다

2023.04.10(월) 09:51:53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이는 우리나라 헌법의 전문 첫 문장으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주권재민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석오 이동녕기념관 태극기 . 왼쪽 아래 모형은 중국 기강의 석오 숙소.
▲ 석오 이동녕 기념관의 태극기와 석오 흉상. 왼쪽 아래 모형은 중국 충칭시 치장구 석오 숙소.

1919년 3ㆍ1운동이 전국과 세계로 확산하자 한 달여 만인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는 각계각층을 대표한 29명의 독립운동지도자가 모여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군주제(대한제국)를 폐지하고 대한민국을 수립하는 헌법을 제정·반포하면서 민주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인민의 평등권과 삼권분립, 종교, 언론, 집회, 결사,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임시정부
▲ 10조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이날 만장일치로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추대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을 맡은 이가 바로 석오 이동녕 선생입니다. 그는 교육의 선각자이자 민주주의의 선구자이며 독립운동과 민주국가 수립에 전 생애를 바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최후의 1인까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석오 이동녕”이라며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쓴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남파오거리 석오 이동녕 안내문.
▲ 천안시 동남구 남파오거리 석오 이동녕 연대기 안내문.
  
하지만 유관순 열사와 함께 천안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석오 이동녕은 아쉽게도 국민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4주년을 앞두고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생가 전경.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 전경.
   
선생의 생가(충남도 기념물 제72호)와 기념관은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동리4길 36번지에 있습니다. 부지 2608㎡에 전체면적 144㎡로 2005년 복원됐습니다.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대문이 있는 전체적으로는 ‘ㄷ자’ 형을 이룹니다. 생가에는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모은 작은 도서관 ‘광명책방’이 운영 중입니다. 석오이동녕기념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생가 마루에 설치된 것으로 ‘광명(光明)’은 선생이 1924년 상해에서 조국광복의 염원을 담아 쓴 휘호입니다. 생가 밖 오른쪽에는 이동녕 선생의 좌상(포토존)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 오른편에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 내부1.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 포토존.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 포토존.

1869년 이곳에서 태어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중국 만주 용정 촌으로 망명해 이상설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했고, 1907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합니다.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이시영 등과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이끌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해 임시의정원(국회) 초대의장으로 선임됩니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오 이동녕 생가지 내부2.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오 이동녕 생가지 내부 2.

생가 옆으로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옛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에 이 마을은 배의 형국으로 돛대가 필요해 동네 가운데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생가 뒤편 고목에는 왜가리 무리가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지 은행나무.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지 은행나무.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의 외가리.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생가의 외가리.
 
20년간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끈 선생은 의정원 의장 3차례, 주석 4차례를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존폐 위기마다 이를 극복해냈고 김구 선생과 함께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이끌며 일생을 헌신했지만, 오랜 망명 생활과 과로로 독립을 맞이하지 못하고 1940년 3월 13일 72세로 중국 기강에서 영면해 임시정부에서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고 광복 후 1948년 효창공원에 안장됐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내 이동 경로.
▲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내 이동 경로.
 
그런데 이토록 임시정부의 중심이자 일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생에 대한 예우는 1962년 독립 서훈 추서 시 허술한 자료를 바탕으로 2등급으로 추서되어 공적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게 책정된바, 천안시민들은 건국 서훈 1등급으로 격상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기념관을 찾은 시민이 서훈 격상요구서에 서명하고 있다.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기념관을 찾은 시민이 서훈 격상요구서에 서명하고 있다.
  
생가 맞은편 석오이동녕기념관은 부지 5483㎡에 전체면적 349㎡규모로 2010년 개관했습니다. 입구 전면에는 이동녕 흉상과 뒷면에 '대의(大義)' 휘호와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습니다. 전시관은 모두 6개로 1전시관은 영상을, 2·3전시관은 이동녕의 삶과 사상을, 4전시관은 구국의 여정을, 5전시관은 메시지 영상을, 6전시관은 체험 학습 코너를 갖추고 있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기념관 전경.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기념관 전경.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기념관 .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기념관 체험관.
   
기념관 마당에는 태극기 동산에 이동녕 선생 캐릭터 인형과 각종 나무, 꽃, 그리고 잔디 등을 심어 포토존이 마련돼 있습니다. 찾는 사람에 비해 널찍한 주차장에 편안히 관람할 수 있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석오 이동녕 기념관 .
▲ 석오 이동녕의 휘호 '산류천석(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과 느린 우체통.
  
천안시 영성동 남파 오거리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높이 6m에 기단 5m 등 11m 높이의 선생 동상이 세워지고, 주변에는 선생의 친필인 '산류천석(山溜穿石)'과 '대의(大義)'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천안시 동남구 영성동 남파오거리 석오 이동녕 동상.
▲ 천안시 동남구 영성동 남파오거리 석오 이동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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