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여 년 고고한 자태 지킨 예산 용궁리 백송
▲ 충남 예산군 용궁리 백송 전경.
▲ 적송과 어우러진 충남 예산군 용궁리 백송의 자태.
백송은 나무껍질이 하얀색을 띠는 소나무입니다. 중국이 원산지로 순수함의 상징인 흰색을 좋아했던 조선에서 귀하게 여겨 관상용으로 심었지만, 풍토가 맞지 않아 기르기 힘이 들고 고사하거나 바람에 쓰러지는 경우가 많아 무척 귀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있습니다.
▲ 백송은 수령 40년이 지나면 나무껍질이 흰색을 탈피한다.
이번에 소개할 충남 예산군 용궁리 백송은 높이 14.5m에 가슴높이 둘레 4.7m로 국내에서 가장 풍모가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원래 밑에서 세 갈래 가지가 뻗어 아름답게 자란 모습이었지만, 두 개는 말라 죽고 현재는 한 개만 살아남아 전체적으로 빈약해 졌음에도, 멀리서도 한눈에 띄는 자태를 뽐내며 여전히 당당함을 지키고 있습니다.
▲ 멀리서도 한눈에 수려한 모습을 뽑내는 백송의 자태.
추사 김정희가 200여 년 전인 조선 순조(1809년) 당시 부친 김노경을 수행해 청나라 연경(베이징)을 다녀오며 가져온 씨앗 여러 개를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에 심었는데 유일하게 생존한 것이라 합니다. 어릴 때는 나무껍질이 매끄러운 담회색이었다가 20년이 지나면서 껍질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40년이 지나면 넓은 껍질을 떨구며 비로써 특유의 회백색을 나타내는데 이 때문에 ‘백골송’ 또는 ‘백피송’이라고도 부릅니다. 일반 소나무보다 가지가 많이 퍼져 수형이 아름답고 추위에 강하지만, 자라는 속도가 더디고 국내에서는 번식이 어려워 몇 그루 없는 희귀목입니다.
▲ 백송은 가지가 많이 퍼져 보나무 중에 수형이 아름답다.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를 비롯해 서울 원효로(제6호), 서울 재동(제8호), 서울 조계사(제9호), 고양 송포(제60호) 충북 보은(제104호), 이천 신대리(제253호) 등이 천연기념물로 보호되다가 최근 원효로와 보은 백송은 고사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된 상태입니다.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 안내문. 원효로와 보은 백송은 문화재 지정이 해제됐다.
우리 고유의 소나무는 나무껍질이 붉은 ‘적송’과 바닷가에서 주로 자라는 흑갈색의 ‘해송’, 여러 갈래 가지가 나뉘는 키 작은 ‘금송’ 등이 있는데 김흥경의 묘에는 후면에 병풍처럼 감싸 안은 적송과 전면의 백송이 어우러져 더욱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 김흥경의 묘를 병품처럼 감싸 안은 적송. 백송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김흥경의 묘를 병품처럼 감싸 안은 적송이 백송과 어우러져 있다.
백송이 성장하는 과정은 인근 백송공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용궁리 백송의 후손 목이 추사 김정희의 서예작품을 주제로 한 조각품 사이로 심겨 있습니다. 아직은 어려다 보니 백송이라 하기에 나무껍질이 회색에 가깝습니다. 일부 자란 백송은 껍질이 벗겨지며 흰색이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용궁리 백송의 후계목이 자라는 백송공원.
▲ 용궁리 백송의 후계목.
백송공원 옆으로는 화순옹주홍문이 눈길을 끕니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김한신이 3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화순옹주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14일을 굶어 함께 죽는 열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조는 옹주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어 불효라 하여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지만, 정조가 열녀문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 화순옹주홍문. 홍삶누 대신 정문에 현판을 달았다.
화순옹주홍문은 조선 시대 왕실의 유일한 열녀문으로 유명합니다. 별도의 홍살문을 세우는 대신 정문 위에 ‘열녀수록 대부월성위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배 화순옹주지문’이라 새겨진 현판을 붙였습니다. 홍문의 뒤편 언덕에는 김신일과 홍순옹주위 묘가 있습니다.
▲ 화순옹주의 집터.
소나무의 우리말 ‘솔’은 으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무 가운데 으뜸은 소나무라는 뜻입니다. 새해를 맞은 요즘 어려운 결심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왕이면 혹한에도 절개와 인내의 당당함을 보여주는 용궁리 백송앞에서 작심하시면 사흘을 넘기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