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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번잡함을 벗어난 사색 명소 맹씨행단 '쌍행수'

600여 년 고택을 지켜온 쌍행수의 노란 가을빛

2022.11.03(목) 17:05:05 | 장군바라기 (이메일주소:hao0219@hanmail.net
               	hao021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산 맹씨행단 쌍행수. 600여 년 고택을 지켜왔다.

▲ 아산 맹씨행단 쌍행수. 600여 년 고택을 지켜왔다.

 
가을 하면 단풍놀이가 제격인데요, 유명 관광지마다 인파로 붐비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번잡함을 벗어나 나만의 사색에 잠겨 만추의 우수를 느낄 수 있는 맹씨행단에서 600여 년 세월 고택을 지켜온 '쌍행수'의 가을빛을 담아 왔습니다.

맹씨행단 입구. 600년 고택의 고풍스러움이 느껴진다.

▲ 맹씨행단 입구. 600년 고택의 고풍스러움이 느껴진다.

  
아산시 신창면 고불 맹사성의 고택인 맹씨행단은 가을이면 마치 연리지처럼 마주 보며 600여 년의 세월을 함께 지켜온 쌍행수의 자태가 압도적입니다. 맹사성이 직접 심었다는 이 은행나무는 봄에는 연두빛으로 여름에는 초록으로,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고택을 감싸고 있습니다.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아직도 해마다 은행 5가마니씩을 넉넉히 수확한다고 합니다.

아산시 신창면 맹씨고택.

▲ 아산시 신창면 맹씨고택.

   
맹사성은 은행을 심고는 돌로 단을 만들어 뜻있는 인사들과 학문을 논했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는 ‘야외 토론회’을 열었던 셈입니다. 마치 공자가 제자들과 살구나무 아래 문답 수업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 단을 만들고 제자들과 경전을 공부한 것을 ‘행단(杏壇)’이라 한 것처럼 맹사성도 은행나무 행단을 만든 것입니다.

맹씨행단 돌담길에서 바라본 쌍행수.

▲ 맹씨행단 돌담길에서 바라본 쌍행수.


다만 왜 중국 공자의 살구나무가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로 바뀌었는데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맹씨행단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에도 400여 년의 행단이 있습니다. 물론 공자의 행단이 살구나무였던 것을 우리나라 유학자들만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저서나 그림에서 살구나무로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은행나무를 사용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행단은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해 살구나무와 차이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맹씨행단 뒷동산에서 바라본 쌍행수.

▲ 맹씨행단 뒷동산에서 바라본 쌍행수.


맹사성 고택의 돌담

▲ 맹사성 고택의 돌담길은 한가로이 산책 하기에 적격이다. 


맹씨행단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청백리이자 명정승인 고불 맹사성(1360~1438)의 고택입니다. 원래 고려말 명장인 최영 장군이 지었는데 손주사위인 맹사성에게 물려줬다고 한다. 우리나라 민가(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 말기 신축돼 여러 차례 수선을 거쳤지만, 600여 년을 이어오며 그 역사적 가치가 높아 사적 제109호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14세기 최영장군이 신축해 손주사위인 맹사성에 물려준 고택.

▲ 14세기 최영장군이 신축해 손주사위인 맹사성에 물려준 고택.

   
고택이 고려시대 특징을 간직하는 것은 기둥에 들보를 얹고 지붕을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살림집에서 흔히 사용된 건축양식으로 현재 민가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루대공 아래에 꽃을 엎은 모양의 복화반 방식도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입니다.

민가(살림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맹사성고택.

▲ 민가(살림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맹사성고택.


대청마루에는 4개의 문짝을 달았는데 한 칸만 사람이 드나들 때 사용하고 나머지는 창문의 개념입니다. 겨울이면 창문을 내려 대청마루를 실내 공간으로 사용하고, 여름이면 모두 들어 올려 시원하게 열린 공간으로 활용하는 다목적 방식입니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흙과 기와를 층층이 쌓아 올린 굴뚝 2개가 있습니다.

맹사성 고택 대청마루의 공간활용도를 높이는 들창.

▲ 맹사성 고택 대청마루의 공간활용도를 높이는 들창.


맹사성 고택

▲ 맹사성 고택의 후면. 낮은 굴뚝 2개가 있다.

 
본채의 오른쪽 뒤편에는 맹사성과 그의 부친 맹희도, 조부 맹유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가 있습니다. 맹사성의 부친과 조부는 ‘조선’을 반대하는 ‘두문동 72현’이라고 합니다. 고려의 멸망에 고려 태학의 72명이 출사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의 고사성어가 생겨났습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10일 고불 맹사성 탄신일을 기념하는 숭모제향이 열립니다.

맹사성과 그의 부친 조부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

▲ 맹사성과 그의 부친과 조부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 입구.


맹사성과 그의 부친 조부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

▲ 맹사성과 그의 부친 조부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

 

맹씨행단을 방문하면 반드시 챙겨봐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맹사성, 황희, 권진 등 조선 세종대왕 시기 정승을 지낸 3명이 지었다는 ‘구괴정(九槐亭)’입니다. 고택의 후문으로 나가 5분 정도 산책길에 있는데 맹사성에게 국사를 논의하기 위해 자주 찾은 이들 정승은 각자 3그루씩 9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었다고 합니다.

맹씨행단 구괴정. 삼정승이 만들었다고 해 삼

▲ 맹씨행단 구괴정. 삼정승이 만들었다고 해 삼상당이라고 부른다.


맹씨행단 구괴정의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철제 지주에 몸을 기대고 있다.

▲ 맹씨행단 구괴정의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철제 지주에 몸을 기대고 있다.


맹씨행단 맞은편으로 고불 맹사성기념관과 기념공원도 들러 보면 좋습니다. 공원의 동상은 맹사성이 검은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장면입니다. 맹사성은 피리를 잘 불었는데 평소 가마 대신 검은소를 타고 나들이했다고 합니다. 이 검은소는 집을 잃은 것을 맹사성이 돌봐주어 마치 가족처럼 따랐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흘을 먹지 않고 울면서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맹사성의 묘 아래에 검은소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출타길에 소에 올라타 피리를 부는 맹사성 상.

▲ 외출길에 소에 올라타 피리를 부는 맹사성 상.


맹사성의 캐릭터를 이용한 석제의자

▲ 맹사성의 캐릭터를 이용한 석제의자


깊어 가는 가을 관광지를 표시하기 위해 호들갑이 떨지 않고도 고즈넉한 안정감을 주는 맹씨행단의 낮은 돌담을 따라 만추의 사색에 잠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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