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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우연히 돌아본 공주동학농민운동 최후 전적지

2022.07.09(토) 05:20:45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목적지 경로를 이탈해 낯선 길로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공주 정안천생태공원의 연꽃정원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백제연못 등 공주시의 연꽃 명소를 돌아보고 있는데요, 공주서혈사지를 찾아 나섰다가 다른 곳들과 성격이 판이한 연못(蓮못) 한 곳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용못

▲ 용못(공주시 웅진동 247)은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4호이다.


충청남도 공주의료원(공주시 무령로 77) 표지석이 세워진 곳에서 도로를 마주한 곳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용못 또는 송장배미라고 불립니다. 용못은 큰 가뭄에도 절대 마르지 않는 깊은 연못이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송장배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1894년 10월~11월에 있었던 동학농민혁명군(이하 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우금티(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리던 농민군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우금티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의 송장이 논배미에 쌓여있어서 송장배미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운동

▲ 공주시는 2019년 11월의 역사인물로 동학농민혁명군을 선정하였다.


동학농민운동 전적지2

▲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추모비를 세웠다.


당시 남북접 연합농민군은 전라도에서 서울로 진군하기 위해 공주 우금티를 넘는 과정에서 2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1894년 10월 23일부터 25일에 걸쳐 제1차 공주전투를 벌였으나, 농민군은 일본군· 관군 연합군에 처절하게 패하였고, 논산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11월 9일에 다시 결전을 감행하게 되었다는데요, 용못의 전투는 1894년 11월 9일에 농민군이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 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조형물

▲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인 용못에는 추모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다른 곳의 연꽃과 달리 용못에 핀 연꽃을 볼 때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장소인 때문인지 비장한 기운을 느끼곤 합니다. 5년 전에도 용못을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와 비교하면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에 대한 안내 및 주변 경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는데요. 꾸준히 돌보고 가꾸어 더 많은 이의 관심이 모아지길 바라보게 됩니다.

충남통일관

▲ 충남통일관(공주시 무령로 128/041-881-1212)
 

하고개

▲ 하고개(출처 네이버지도) 


용못을 둘러보고 나서 원래 목적지인 공주서혈사지를 가기 위해 하고개 쪽으로 이동해 보았습니다. 공주서혈사지는 백제시대의 절터이고, 하고개는 공주경찰서와 중동 큰사거리 사이에 있는 고개입니다. 옛날 관리들이 향교를 지나기 위해 말에서 내리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요. 이 하고개에서도 동학농민혁명군의 해골이 여러 바지게 나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고개에 위치한 충남통일관 인근에 공주서혈사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여 충남통일관 옆으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 봤습니다.

시어골

▲ 시어골(서혈동)소류지 (출처 네이버지도)
 

공주시 웅진동 시어골소류지

▲ 공주시 웅진동 시어골소류지


골프 여제, '박세리' 선수의 모교인 공주금성여자고등학교에서 하고개 넘어가는 일대를 숏골(쇳골 또는 金谷)이라 부릅니다. 그 숏골에서 남동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는데요. 그 일대를 시어골이라고 부릅니다. 공주서혈사지를 찾아 들어간 골목 일대가 '시어골'입니다.

공주시 웅진동 시어골

▲ 공주시 웅진동 시어골소류지 주변 풍경


골목 안쪽으로 몇백 미터 들어가니 오른편으로 시어골소류지가 보였습니다. 주변에는 많지 않은 가구가 살고 있고, 녹지 훼손도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2019년, 공주시는 웅진동 무령로~금학동(우금티로) 일원에 왕복 2차로 공사를 계획한 것으로 아는데, 문화재청 심의에서 우금티 유적지 500 m 내에서는 개발행위를 할 수 없는 이유로 도로 개설을 불허했다고 하니, 당분간 마을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어골소류지에 도착해서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와 공주서혈사지는 다음 기회에 가 보기로 하고, 동네 어르신께서 공주 도심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일러 주셔서 교회 건물 뒤로 난 언덕길로 올라가 봤습니다.

공주시 봉황동 말랭이샘

▲ 공주시 봉황동 말랭이샘


언덕길을 얼마간 오르니 내리막길이 시작됐는데요. 그곳에서 주민들이 여전히 사용한다는 '말랭이샘'을 발견했습니다. 

공주시 봉황동 효심1길

▲ 공주시 효심1길


말랭이샘에서 손과 얼굴을 닦으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공주시청에서 멀지 않은 효심1길 동네가 나왔습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으로 이동하려 했다면 이 길을 따라 움직였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공주전투의 패배 원인 중에는 유격전이 아닌 전면전을 펼친 전술상의 문제도 거론되는데요. 용못에서 하고개를 거쳐 시어골소류지를 지나 충청감영이 있던 인근 마을에 도착해 보니, 토벌군과 농민군의 전투력이 1:250인 상황에서 전면전은 너무나 무모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주시 봉황동 봉황큰샘

▲ 공주시 봉황동 큰샘2길의 봉황큰샘


효심1길의 쌈지 주차장에서 옛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사범대학교부속고등학교 쪽으로 내려오니, 백제시대에 대통사에서 사용했거나, 조선시대 충청감영의 전용 우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봉황큰샘'이 나타납니다. 봉황큰샘에서 불과 몇백 미터 거리에는 옛 충청감영이 있습니다.

공주 서혈사지를 찾아가려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충청감영에 당도했습니다. 농민군이 충청감영을 점령하기 위해 1차 접전 후 1만여 병에서 불과 3000여 병, 2차 접전 후에는 500여 병이 점고되는 희생을 치렀다고 합니다. 누구나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연히 들어선 길에서 차로 불과 십여 분 거리를 두고  많은 희생을 치른 아픈 과거사를 떠올려야 했지만, 쉽게 잊어서도 안 될 소중한 투쟁사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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