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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보령 칼럼] 보령의 권설봉수 원산도 봉대

2022.03.07(월) 14:25:55 | 주간보령 (이메일주소:9317733@hanmail.net
               	9317733@hanmail.net)

육로로 간 원산도에서 무엇을 체험할까?

보령해저터널이 개통되고 원산도에 육로가 뚫리면서 섬 아닌 섬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크게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보령 사람들에겐 침체한 지역경제에 새로운 활력이 생기게 될 것이라 기대하지만 막상 원산도에 가면 빈 바다와 바람만이 지난다. 실망을 넘어 그저 황량함을 숨길 수가 없다. 원산도에는 아직 본격적인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봉산 곰솔 숲길 등산 후 원산도 봉대 관망

그래도 오봉산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괜찮다. 섬 속의 산을 등산하는 색다른 맛이다. 등산은 보통 오봉산 해수욕장 절터길에서 시작한다. 안내표지판 따라 곰솔 숲길을 서남쪽으로 10여 분 나아가면 절터가 나오고, 거기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능선 길을 따라 봉화재까지 등산로는 이어지고 진촌으로 내려오면 끝이다. 산은 온통 곰솔 숲이 울창하고 솔향이 그득하다. 솔숲 사이로 초전항과 오봉산 해수욕장 양쪽 바다를 번갈아 보면서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은 올망졸망 오르고 내리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오르고 내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잔잔하게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능선을 타고 30여 분 그렇게 걸으면, 갑자기 봉화대가 우뚝하다. 마치 동화 속 숲에 난 성을 발견한 기분이다. 원산도 봉대이고 등산로도 끝이다.

 

주간보령칼럼보령의권설봉수원산도봉대 1


 

원산도 봉대에 조망할 수 있는 곳

봉대에는 연대(煙臺)가 마치 집의 기초 집터처럼 크게 빙 둘러쳐져 있다. 그 위에는 길고 큰 화강암(원산도 돌이 아닌 것이 분명함)4~5단 차곡차곡 쌓은 둥그런 봉돈(烽墩 높이 90~160cm, 지름 720~730cm)이 성의 돈대처럼 올려져 있다. 봉돈에 다가가면 남쪽으로 안에 드나들 수 있는 175cm 정도의 입구가 있고 봉돈 안이 파여 있어 연조(煙?, 봉화를 피우던 아궁이) 흔적을 볼 수 있다. 그 옛날 외적 침입 등 주변 바다의 군사적 정보를 불이나 연기를 피워 충청수영 망해정으로 연락하던 봉대이다.

봉대에 올라서면 가까이 진촌, 선촌, 저두, 초전 등 원산도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멀리 사방으로 바다와 섬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동쪽으로는 충청수영성이 있는 망해정, 북쪽 원산안면대교 넘어 안면도, 서쪽 초전항을 넘어 장고도와 고대도, 남쪽 오봉산 끝자락 넘어 삽시도, 녹도가 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확 틔어 시원하다. 주변 바다 상황을 모두 조망할 수 있어 그 옛날 외적의 출입을 충분히 탐지하여 수영에 즉각 알릴 수 있다.

이양선 출몰 감시하던 권설봉수(權設烽燧)

여기 봉대는 내지봉수대와는 그 운용 방법과 격이 사뭇 다르다. 국가 단위의 5로 봉수대와는 달리 충청수영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조기 경보 체제이다. 이러한 경우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자주 등장한다. 전라좌수영 수군진(水軍鎭)의 배후 산정에 수군(水軍)들이 임시로 설봉하여 해상의 안위를 진()에 알리도록 한 요망대 혹은 봉대 등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충청수영에서 운영하던 권설봉수에 관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아 그 설봉 시기와 운용 방법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조선 후기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혹은 대동지지(大東地志)1872년 군현지도에서 조금씩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숙종 때 비변사등록에 어청도, 외연도, 녹도 봉군의 입번(立番)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그 실효성마저 찾기 어려우니 혁파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황당선(荒唐船) 또는 이양선(異樣船)이 서해안에 자주 출몰하면서 홍주목 어청도(외연도까지 19km), 외연도(녹도까지 16km), 녹도(원산도까지 17km), 원산도(망해정까지 12km)에 봉수대를 다시 설봉하고 그 감시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당시 지도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1861년 대동여지도에는 연통에 달린 횃불 표시로 어청도, 외연도, 녹도, 원산도, 망해정의 봉수대가 표기되어 있고, 1872년 군현지도에는 연통에 달린 횃불 표시와 함께 봉대(烽臺)라고 표기되어 있다.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한 봉수

봉수는 밤낮으로 연기()와 횃불()로 군사 등 주요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산이 많은 한반도에서는 아득한 옛날부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가락국에서는 멀리 인도 아유타 왕국에서 온 허황옥을 불빛과 연기로 김수로왕께 안내한 이야기가 전하고, 고구려에서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사이의 사랑과 자명고 이야기가 전해져 봉수체제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고, 고려 때는 송나라 사신 서긍이 중국 남방에서 사행로(斜行路)로 흑산도를 경유 개성까지 이르는 뱃길에 해안 봉수로 안내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세종 때 적정과 관련된 신호체계를 5거로 봉수 체제가 최종 완성되었고, 전국을 5 선로로 네트워크화하여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보령지역도 국가 관장의 제5로의 간선로가 지나고 있다. 옥미봉(웅천 잔미산), 조침산(주교 봉대산), 흥양곶(천북 봉화산) 등이 그것이다. 통달산, 여도재, 덕산 등에도 시대에 따라 설봉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선로를 통해 최종 경봉수에 그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였지만, 접적지역에 위치하였기에 그 앞에 펼쳐진 군사적인 상황을 수집하는 연변봉수 역할도 담당하였다.

 

학술 연구와 문화재 지정 절실

우리 지역 보령에는 이렇게 내지봉수, 연변봉수, 권설봉수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 그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여 원산도, 녹도, 외연도 봉수대는 지금도 조금만 수리하면 곧바로 불을 지펴 신호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 바다에 황당선과 이양선 출몰의 감시 장면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 선조들이 세상의 변화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토를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문화적 자료임이 틀림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 문화자료가 아무런 국가적 보호를 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안내표지판 하나도 없다. 이를 위한 관심과 학술 연구, 문화재 지정 등 보존 노력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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