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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보령 칼럼] 충청수영성 내 明 水軍 季金將軍 淸德碑

2022.02.27(일) 13:04:54 | 주간보령 (이메일주소:9317733@hanmail.net
               	9317733@hanmail.net)

주간보령칼럼충청수영성내 1


충청수영성 내 정유재란 승리 주역 명수군 장군 비석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는 국토수호 역사와 수려한 경관을 노래한 시문을 동시에 찾아볼 수 있는 충청수영성이 있다. 그 옛날 군선이 정박하고 수병이 드나들었을 서문(望華門)은 여전하다. 홍예로 되어 그 옛날 긴박함을 느끼며 성안에 들어서면 바다를 쉽게 조망할 수 있는 구릉이 넓게 펼쳐진다. 왼쪽 성벽 안으로는 언덕길이 있고 그 길 따라 50보쯤 위에는 진휼청(賑恤廳)이 남아있다. 또 그 뒤로 돌아서면 꼭대기엔 天上樓臺 畵中江山 영보정이 우뚝하다. 정면은 한때 관청, 창고, 관덕정, 능허각, 대변루, 고소대 등 수 많은 건물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바람만 지나는 빈터다. 조금 더 멀리 동문 가까이에는 객사와 삼문이 남아있다. 구릉 아래 오른쪽 내리받이에도 옛 건물지로 보이고, 바로 그 아래 더 내려가는 언덕 즉 오천초등학교와 뒤편에는 계금장군 청덕비가 있다.

비석은 푸른 빛이 도는 대리석으로 되어 단단하고,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 104cm, 48cm, 두께 14.3cm로 허리 숙여 400년 전 비문을 찬찬히 읽을 수 있다. 받침돌은 82cm×70cm로 땅에 묻혀있다. 지붕돌은 위를 묘갈처럼 둥글게 처리하여 따로 덮개돌은 두지 않았고, 나선형의 구름무늬가 앞에 7개 뒤에 2개가 새겨져 있으나 제액에는 특별히 글씨가 새겨져 있지는 않다. 주변에는 장초석 2, 옥개석 1개가 있는데 지금 자리로 옮겨오기 전 또 다른 비석이 있었거나 비각을 세워 보호했던 흔적인 것 같다.

420년 전 세워진 비석

앞면 비명은 흠차통령절직수병유격장군계공청덕비(欽差統領浙直水兵遊擊將軍季公淸德碑)라고 선명하다. 황명에 따라 절강성과 남직례(황제의 직할 통치 지역)의 수병 지휘관 유격(참장) 계금의 맑은 덕을 기린다는 것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 격퇴 조선 구원 임무를 띠고 2,000리 바다 건너 출정한 명나라 수군 장수가 남쪽 이순신 군과 합류하기 전 5개월 정도 여기 오천에 머물렀는데, 엄정한 군기와 주민 보호 우선의 그들에게 성내 주민들이 나서서, 그들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의 맑은 덕을 기리며 전쟁에 나서는 그들의 무운을 소원한 것이다. 당시 계금을 안내하던 접반사 안대진(보령사람, 승문원 교리, 이산보 문인, 선무호성청난공신)이 글을 짓고 당시 의병장 박사체가 글씨를 썼다.

그 비명 아래에는 장군을 수행한 휘하 간부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연대장급의 천총(天摠), 그 아래 간부 파총(把摠)의 이름이 빠짐없이 망라되어 있다. 이들 명나라 수군 장교들은 모두 무술년 426일 자 난중일기에도 똑같이 언급되어 있다. 바로 계금군이 남하하여 고금도 이순신 장군 군영을 찾아 합류할 때 장군께 인사하면서 선물을 건넸다. 이순신은 그 선물 준 사람과 품목을 일일이 다 기록하여 그들의 정성과 고마움을 새겼다. 모두 당시 절강성 혹은 남직례 출신이다. 받은 선물은 한결같이 그들이 일상 사용한 남쪽 나라 차와 간단한 생활 도구들이다. 비석이 세워진 해가 무술년 15984월이니 지금부터 꼭 424년 전의 일이다.

엄정한 군기와 주민 보호 우선의 계금 군대

비석의 뒷면에는 장군의 청덕과 그의 무운을 비는 내용으로 700여 자가 새겨져 있다. 계금장군과 그 휘하 3,300여 장졸이 1597년 동짓달 중순 북서풍 몹시 불어 상륙 곤란의 오천에 도착하던 날의 전경, 전쟁이 길어지면서 여타 다른 곳 명군의 주둔 피폐가 극심하였지만 계금 주사군만큼은 이와는 달리 한치 부끄러움이 없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정유년 11월부터 이듬해 무술년 4월까지 여기 오천에 머무르는 동안 그들은 구원군으로서 주민들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남쪽 조선 수군과 합류하러 떠날 때 성내 모든 사람이 나서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청덕비를 세워 그들의 덕을 찬미하고 반드시 왜적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를 물리쳐 끝내 승리하고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예교성 전투 부상 투혼, 노량해전 승리 주역 계금장군

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후 명 심유경과 왜 고니시 유키나가 주도의 강화회담이 열렸지만 끝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도래하자 조선은 부랴부랴 명군의 추가 출정에 매달리고, 종전 육군 중심 구원군에서 실전경험의 수군을 출전해 줄 것을 강력히 희망하였다. 그때 당시 왜를 상대하여 최강 전력은 단연 절강성 수군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의 이러한 요구를 충분히 이해하였다. 더 나아가 왜의 해안을 통한 명나라 접근을 막고 대마도 및 일본 본토의 보복 응징을 위해서도 실전적인 수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수군 최초 절강성과 남직예 주사군 3,300명을 이끌고 유격 계금이 출정하기로 한 것이다. 계금은 그 후 연안항해로 절강해역을 출발 대륙연해안과 산동북단해역을 지나 등주와 내주에서 새로 군선을 건조하여 묘도열도와 요동남단을 거쳐 의주를 지나 한반도 북단 해역을 통해 들어오게 되었다. 정유년 5월에 출발하여 10월에 한반도에 도착하게 되었다. 처음엔 조선 수군의 칠천량 대패로 한양 도성이 위험하다고 여겨 한강 입구 방어에 나섰으나, 조명연합군의 직산전투 승리와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리로 강화도 앞에서 나와 남쪽 조선수군과 합류하여 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11월 중순에 충청도 보령 오천 충청수영성에 들어오게 되었다. 남쪽 이순신 함대와 합류하라는 명을 받고 잠시 남원 시라산으로 내려갔다가 이듬해 오천에 되돌아와 머물다가 4월에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이순신 부대와 합류한다. 그러다가 3달 후 진린 총병을 맞아 조명연합수군 함대가 드디어 결성되고 절이도 해전, 순천예교성 전투, 노량해전 등에 앞장서서 참여하게 된다. 계금은 전투 중 크게 상처를 입어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다. 한때 연합군 총사령 진린의 소극 참여와 졸전으로 계금을 수군 총사령으로 앉히고 진린은 육로로 돌리자는 의견까지 대두되기도 하였다.

이순신 통제사, 등자룡 부총병까지 전사하는 마지막 싸움 노량해전은 조명연합군이 승리하여 일본은 한반도에서 모두 철군하고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음 해 1599년 신미년 조명연합군 제장과 조선 조정의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승리 축하연이 벌어졌을 때 선조가 직접 유격 계금(季金)"대인(大人)은 노량(露梁)의 전투에서 먼저 배에 올라 싸웠습니다. 왜적들이 패하여 달아난 것은 모두 대인의 공로입니다."라고 칭송하였다. 계금은 본국으로부터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휘하 장졸들을 남겨둔 채로 본진보다 먼저 423일 선조께 인사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휘하 장졸들은 이듬해 1600년에 돌아갔다.

비와 관련된 민속(民俗)

비문 중에 전횡장군(田橫將軍)500 군사를 언급하고, 장군은 위엄과 덕성을 지녔으며 3,000 군사를 이끌었다.”, “성중의 부노들이 모두 장군의 은혜를 독차지하려 한다.", “장군의 위엄을 빌어 복을 기구함이 가하지 않겠는가?” 등이 있어 근래까지 주민들에 의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민들이 바다에서의 안녕과 복을 비는 신앙의 상징물로 삼았다. 세??의 흐름과 함께 근래에는 집안의 복을 비는 대상물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청덕비를 통한 양국 관심과 교류 확대

향토연구 단체인 보령문화연구회(당시 회장 임근혁)는 비문에 나타난 계금의 연고지 중국 절강성 태주부 온녕시 송문진을 찾아 계금의 후손과 행정당국에 명수군 계금장군 청덕비가 충남 보령에서는 각별히 보호되고 있음을 알리고 상호 교류를 희망하였다. 이에 곧바로 아주 좋다.’는 연락이 오자 20092월 회원 30여 명이 태주시, 온녕시 송문진을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과거 우리가 위난에 빠졌을 때 계금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 역사를 상기하고 감사와 그의 용맹 전쟁 승리에 경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청덕비의 탁본과 사진, 보령특산물인 머드제품과 수산물을 전하였다. 앞으로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싶다는 의사도 전했다. 온녕시 주민과 행정당국은 크게 반기고 환대하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이 그 지역신문 온녕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고 중국 인터넷 사이트 바이두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그 후 양국의 학계에서는 계금 장군과 명 수군의 활약상을 연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014년 여름엔 계금 후손 일행 다수가 보령을 방문 청덕비를 찾아 관람하고 보령문화연구회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앞으로 보령시와 온녕시(절강성 지급시, 100만 인구) 사이에 계금장군 청덕비를 계기로 양지역 주민간 교류를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길 희망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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