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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청양 탐방① 】모덕사 홍문 근처 칠엽수는 왜 베어졌을까?

2021.10.25(월) 02:18:03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대풍을 기대한 농군들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 잦은 비가 달아나고, 연일 쾌청한 날씨가 이어진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야외활동하기 좋으니, 잠시 다녀올 수 있는 근거리 여행지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10월 초, 공주시 신풍면에 있는 구절산 구룡사를 찾아가다 청양군에 소재한 모덕사를 지나쳤었다. 단풍이 물들 때쯤 둘러보면 좋은 곳이어서 점찍어 두었다가 얼마 전 방문하게 됐다.

모덕사 연못에서 본 모덕사 전경 ▲ 모덕사 연못에서 본 모덕사 전경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상
▲ 모덕사(청양군 목면 나분동길 12)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상

조선 후기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 선생(勉菴 崔益鉉: 1833~ 1906)은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그의 퇴출을 주장하다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다 투옥되기도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을사의병)의 전개를 촉구하는 한편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으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1906년 11월 17일 인시에 순국했다.

모덕사(慕德祠)는 위와 같은 면암 최익현선생의 항일투쟁과 구국정신을 기리고자 1914년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일제강점기의 사당이다. ?모덕사 내에는 대의관(大義館), 춘추각(春秋閣), 고택(古宅), 영모재(永慕齋),사당(祠堂), 영당(影堂) 건물이 배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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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 고택(古宅): 면암 최익현 선생이 건립하여 거주하던 집으로 선생은 1900년(68세 때) 출생지인 경기도 포천에서 이곳으로 이사했다. 안채, 사랑채, 영모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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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영모재(永慕齋): 조상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중화당
▲ 중화당(中和堂): 면암 고택의 사랑채로 구동정사(龜洞精舍)라 하였다. 면암 선생은 이곳에서 많은 애국지사를 모아 강의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여 1906년 의병을 일으키게 된 곳이다. 면암 선생이 순국한 뒤에는 후손이 계속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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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덕사
▲ 모덕사(慕德祠)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다.

면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의 명칭은 고종황제가 면암선생께 내린 밀지 중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라는 구절에서 '모(慕)'자와 '덕(德)'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매년 음력 9월 16일 유림주관으로 제향한다.

마침 모덕사를 방문한 날은 오전 11시부터 제향이 있는 날이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참가 인원에 제한이 있어 조용한 가운데 준비를 서두르는 모습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이 환국고유제를 지낸 곳이며, 1953년 해공 신익희 국회의장이 환도고유제를 이곳에서 봉행했다고 한다.

청양탐방모덕사홍문근처칠엽수는왜베어졌을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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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관
▲ 춘추각(春秋閣):1985년 면암 선생의 서책, 서간문 등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로 전적류 4023점, 서찰 및 고문서류 1974점이 소장되어 있다.

춘추관 내부
▲ 춘추각 내부

1982년, 면암 선생의 유품과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한 대의관(大義館)은 휴관 중으로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 대신 운 좋게도 일반인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1985년에 면암 선생의 서책, 서간문 등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한 춘추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을 만큼 보안이 강화된 곳이다. 이날은 학술 연구를 위해 잠시 잠긴 문을 개방한다고 하여 득달같이 달려가 내부 모습을 살폈다.

면암 선생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갈리기도 하지만, 서찰과 상소문 등 방대한 고문 서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선생의 구국 의지에는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당
▲ 영당((影堂)은 1905년(고종 42년) 정산 현감 채용신이 그린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매년 4월 13일(의병거의 기념일)에 청양군 주관으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성충대의의사비(聖忠大義意思碑)
▲ 성충대의의사비(聖忠大義意思碑)

모덕사 관광안내도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영당을 둘러보고 삼문을 나오면 최익현 선생의 '면암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개인이 사비로 설치 및 보수를 지속하고 있다고 한다.

홍문
▲ 모덕사 홍문

모덕사 연못 쪽으로 걸어 나오다 홍문 근처를 유심히 살폈다. 3년 전쯤 베어졌다는 칠엽수, 일명 '마로니에(marronier)'라고 불리는 나무 밑동을 찾기 위해서다. 

모 인사가 모덕사에 방문했다가 홍문 인근에 심겨 있던 칠엽수는 일본인이 심은 나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그 후 그 칠엽수는 베어지고 말았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고자 했으나 찾지 못했다.

일본(인)이 주는 음식과 물을 거부하며 아사 순국한 면암 선생을 기리고자 건립한 곳이니, 일본인이 심은 칠엽수를 그냥 둘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칠엽수를 베게 된 경위를 안내문으로 남겨 교육적으로 활용할 수는 없었을까? 모덕사를 등지고 오는 내내 기대만큼 물들지 않은 단풍보다도 더한 아쉬움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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