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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 땅 그 자리 그리고 물의 길

과거의 로지스틱스, 그리고 희망의 굴포운하

2021.10.24(일) 19:20:26 | 나드리 (이메일주소:ouujuu@naver.com
               	ouujuu@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좋은 날이 될 거야’ 이런 희망은 힘든 오늘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저수지에 동동 떠다니는 나뭇잎에 걸터앉은 가을이 물고기의 입맞춤에 흔들거린다. 흔들거리는 물방울이 내 마음으로 밀려오면 고단한 꿈과 이상(理想)의 피로회복제가 된다. 철학자 칸트는 이상(理想)을 ‘객관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최고의 완전태이며, 이념으로 규정된 개별체’라고 규정지었다. 그래서 이상(理想)은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을 돕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논리적인 객관성을 갖춘 이상은 개별체로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을 하늘에 희망이 가득하다
▲ 솔감저수지에 담긴 가을 하늘이 희망으로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은 제주도이다. 행정구역상 광역자치단체인 제주특별자치도이며 면적이 1833.2㎢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섬은 거제도이며 크기가 380.1㎢이다. 만일 887년 전 고려시대 인종임금이 굴포운하를 성공적으로 완공했다면 충남 태안군은, 태안도(泰安島)가 되어 우리나라 두 번째 큰 섬으로 지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현재 태안군의 면적은 504.94㎢이다. 역사는 굴포운하를 미완성으로 기록했지만, 그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천수만의 물길을 감추고 능청스럽게 가을을 품고 있는 인평저수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인평저수지에서 흥인천으로 이어지는 수로
▲ 인평저수지에서 흥인천으로 이어지는 수로

고려 17대 인종임금은 1134년에 태안군 천수만의 북쪽 끝자락과 서해의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굴포운하의 개착을 시도했다. 지금의 태안군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의 중간이다. '고려사'를 보면 '정습명을 책임자로 하여 군사 수천 명을 동원하여 굴포운하 공사를 했지만 실패했다'고 기록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 중종때까지 500년간 지속된 운하공사는 총 길이 7km 중 4km 정도 파고 중단되었다.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로 흙이 무너지고, 지반이 암반층이어서 결국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인평2리에 있는 굴포운하 안내도
▲ 인평2리에 있는 굴포운하 안내도

태안군 인평리에서 만난 가을은 서산시 부석면 가사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인평저수지’는 천수만의 북쪽에 있는 굴포운하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태안군 도내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에 있는 ‘솔감저수지’도 굴포운하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점이다. 솔감저수지는 가로림만의 남쪽에 위치했으며, 서해의 바닷물을 갑문식으로 통제하고 있다. 굴포운하는 ‘인평저수지’에서 7km에 이르는 ‘솔감저수지’를 연결하는 수로공사였다.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바라 본 인평저수지 모습
▲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바라 본 인평저수지 모습

굴포운하는 고려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이었다. 물길을 만들면, 지역특산품들을 교환하면서 경제적인 특혜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쌀과 비단 같은 생활물품을 실은 돛단배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물위에 떠다니는 백화점과 같았다. 그래서 나루터는 사람들의 꿈과 이상이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곳이었다. 당시의 나루터는 결혼을 앞둔 사람들은 비단과 화장품을, 의료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귀한 약재를, 부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금은보화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나루터는 사람들의 아픔과 기쁨이 함께 명멸하고 있었다.

흥인천 위 인평교에 차량들이 이동하고 있다
▲ 흥인천 위 인평교에 차량들이 이동하고 있다 

굴포운하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풍속을 기술한 ‘고려도경’의 저자 송나라 서긍이 개성으로 항해하던 길에 마도 인근해역을 지나면서 물길을 이렇게 적었다. ‘암초로 인하여 격렬한 파도와 세찬 여울이 휘몰아친다. 안흥정 아래 물길이 열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 또 중종때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옛날엔 난행량(難行梁)이라 하였다. 바닷물이 험하여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해서 안흥량(安興梁)이라고 고쳤다’고 적혀있다. 조정대신들과 상인들에게는 죽음의 난행량이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굴포운하 자리에 도로가 잘 놓여 있다
▲ 굴포운하 자리에 도로가 잘 놓여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생산된 공납품과 세곡과 같은 물품들은 나주의 영산창, 영광의 법성포창에다 보관을 미리 한다. 그러다가 날씨가 좋으면 서해안 연안의 수로를 따라서 강화도 앞바다를 지나면 한강의 조강을 거쳐서 서강 근처 광흥창에 모여들어 짐을 풀어서 한양으로 실어 나른다. 조선의 수운은 한강을 통과해 한양으로 가야하는데 그럴려면 안흥량(安興梁)을 지나야 한다. 당시는 안흥량을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렀는데 세곡선과 조운선들이 이곳을 통과하다가 침몰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현재 태안군 마도해역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선박들이 발견되어 '수중문화재의 보고', '바닷속의 경주', '난파선의 무덤'으로 불리우고 있다.

굴포운하 자리에 흥인천이 인평저수지로 흐르고 있다
▲ 굴포운하 자리에 흥인천이 인평저수지로 흐르고 있다

굴포운하 공사가 지지부진해지자, 조선 중종 16년(1521)에 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와 의항리를 연결하는 '의항운하'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537년 2월부터 승려 5000명을 동원하여 의항운하 공사는 6개월 만에 완료되었으나,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로 공사 직후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공사 책임자인 '이현'은 삭탈관직되었는데, 뇌물을 받고 공사에 동원되지 않은 승려들에게 호패를 발급했으며, 공사에 사용하였던 기물들을 사사로이 간척지를 메우는데 사용한 죄목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부실공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는 인류문명의 해악이다.

역사의 흔적을 지우려는 문명 이기주의에 맞서는 주민들의 마음
▲ 역사의 흔적을 지우려는 문명 이기주의에 맞서는 주민들의 마음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나온다. 북산에 살고 있는 우공이라는 노인이 높은 산 때문에 통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둘레가 700리에 달하는 큰 산맥의 흙을 왕복하는데 1년이 걸리는 먼 바다까지 옮기기로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친구가 그만둘 것을 권유하자 우공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과 손자가 있고, 그들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산은 불어나지 않을 것이니, 대를 이어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산이 깎여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우공이산은 무슨 일이든지 꾸준하게 하면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수천 명의 군사들이 굴포운하를 뚫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을까? 가을 햇살이 자글거리는 논에서 굴포운하의 흔적들이 우공의 말뜻을 되새긴다.

굴포길에는 굴포운하의 꿈이 서려있었다
▲ 굴포길에는 굴포운하의 꿈이 서려있었다

여여하게 펼쳐진 가을의 길모퉁이에 꿈과 이상이 흘러내리고 있다. 논에서 일렁이던 황금물결의 벼들은 누런 알곡을 까칠하게 감싸 안고 있다. 역사의 흔적이 가득한 들판에는, 가을이 바람에 휘청거린다. 논두렁에 풀들이 바람에 수런거리고 아득한 굴포길은 그 끝을 감추고 호기심으로 유혹하고 있다. 땅이 ‘어질고 평평하다’고 하여 ‘인평리’라는 지명을 얻은 이곳은 굴포운하의 흔적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887년 전을 상상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무시해야 하는 일이다. 굴포운하와 소통할 수 있는 심증(心證)을 갖고 시간과 공간을 무시한다면 나의 논리는 공허하다. 아득한 굴포길을 계속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흥인천에 굴포운하의 꿈이 흐르고 있다
▲ 흥인천에 굴포운하의 꿈이 흐르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 물류운송 체계는 해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과 높은 산길이 많았던 당시로써는 육로의 우마차보다는 수상의 돛단배가 훨씬 유리한 교통수단이었다. 당시 돛을 달아서 바람으로 이동하는 풍범선(風帆船)에 쌀 300석을 실을 수 있었다. 길이 좋지 않았던 당시에 소나 말이 끄는 수레를 사용하면 쌀 12석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수상운송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수상운송은 바다에서 강으로 그리고 하천으로 이어졌으며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포구가 발달되었다. 포구에는 주막이 있었고 고단함을 풀어지는 국밥과 막걸리는 상인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상인들의 입장에서 유행가 가사에서 나오는 ‘바다가 육지라면~’이 아니라 ‘육지가 바다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인평2리 마을에 있는 굴포운하에 대한 표시 글
▲ 인평2리 마을에 있는 굴포운하에 대한 표시 글

인평저수지 끝 인평2리를 거쳐 도내리로 이어지는 솔감저수지까지는 자가용으로 10분 거리이다. 도로는 잘 포장되었고 도로 옆 전원주택에서 개 짖는 소리가 고요한 마을에 울려 퍼졌다. 알 수 없는 길모퉁이로 이어지는 역사의 흔적들은 도로에서 호기심과 함께 반기고 있었다. 시간의 블랙홀과 같은 길 끝에 잠들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숨결을 찾아가는 일은 시간과 함께 인내가 필요했다. 백화산을 뒤로하고 팔봉산을 우측에 둔 도내리 길은 가을이 물들어있었다.

솔감저수지와 서해바다를 경계로 갑문이 역할을 다하고 있다
▲ 솔감저수지와 서해바다를 경계로 갑문이 역할을 다하고 있다

솔감저수지는 태안군 도내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도내리와 어송리 사이에 굴포운하가 뚫렸다면, 서해의 바닷물이 천수만으로 흐르고 구도항에서 영목항까지 뱃길이 열렸다면 어떨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태안군은, 굴포운하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역사의 흔적들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솔감저수지의 모습
▲ 솔감저수지의 모습

팔봉산 아래 펼쳐진  솔감저수지 모습
▲ 팔봉산 아래 펼쳐진 솔감저수지 모습

깊어가는 가을날, 솔감저수지에서 시간을 낚으려는 낚시꾼들이 몰려들고 있다. 저수지에 던져둔 낚싯대에 달린 찌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자유롭고 그윽하다. 물멍을 즐기려는 듯이 저수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물고기의 입질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낚싯대를 걸쳐둔 채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는 사람들도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역사의 꿈과 그들의 꿈은 분명 그 결이 다르지만.

가을이 판목운하의 꿈으로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 가을이 판목운하의 꿈으로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887년의 역사를 간직한 솔감저수지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굴포운하의 꿈을 이루지 못한 과거의 시간에 기대어 미래의 꿈을 후대에게 말할 수 없다. 2021년 가을, 라면봉지와 담배꽁초 같은 쓰레기가 흐르는 솔감저수지의 한 자락에 억새가 흔들거린다. 당신이 무심코 버린 쓰레기가, 우리 역사를 쓰레기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충남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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