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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보령 탐방③】다섯 개의 은빛 무지개 떴던 순교사적지, '갈매못 성지'

2021.09.26(일) 20:08:45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9월 초순에 찾은 보령에는 가보고 싶지 않지만, 꼭 가봐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대전교구 소속의 천주교 순교사적지인 '갈매못 순교성지(이하 갈매못 성지)'다. 우리나라의 아픈 근대사를 거론하며 신유박해 (1801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천주교 박해를 빼놓을 수 없는데, 보령의 '갈매못 성지' 일대는 조선 수군의 훈련장이자 병인박해 때 천주교도들의 사형장으로도 사용된 곳이기 때문에 다른 명소를 찾을 때와는 마음가짐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갈매못성지(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 도시지정문화재 제183호인 '갈매못 순교성지(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천주교 전래 초기에 천주교인들의 신앙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내포의 '갈매못'은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연못'이라는 의미로 옛 이름은 '갈마연(渴馬淵)'이라 했다고 한다. 

갈매못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조선 제5대 교구장이던 다블뤼(Davelu) 안 안토니오 주교, 주교의 복사이자 회장인 황석두(黃錫斗) 루카, 신부 위앵(Huin) 민 마르티노, 신부 오메트르(Aumaitre) 오 베드로,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樂韶) 요셉, 5人이 200여 명의 군인과 지역주민,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문효수를 당한 곳이다. '군문효수'는 조선시대 국가에 큰 죄를 지은 죄인을 군율(軍律)에 따라 목을 베고 군문에 매달던 형벌로 민중들을 경계하는 뜻에서 취해졌으며, 천주교 박해 때 외국인 선교사들을 체포하여 처형할 때 행하던 형벌이다.

첫 순교터
▲ 다섯 순교자의 첫 매장터

1927년부터 성지로 관리되기 시작한 갈매못 성지에 들어서자 조성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다섯 순교자의 첫 매장터가 나타났다. 

14처
▲ '십자가의 길' 기도 14처 

매장터 뒤로는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실 때까지의 수난을 기억하도록 14처가 마련돼 있었다.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심은 나무
▲ 갈매못 순교 성인 순교 150주년 및 프랑스 순례단 방문을 맞아 성인들의 순교를 기리는 나무를 심었다.

해안 도로 쪽으로는 소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다. 안내문을 읽어 보니 갈매못 순교성인 순교 150주년이던 2016년에 프랑스 순례단이 갈매못 성지를 방문했는데, 이때 순교의 땅에 고향의 흙을 더해 성인들의 순교를 기리면서 심은 나무라고 한다.

순교성인비와 복자비
▲ 순교성인비와 복자비

그 옆으로 순교복자비와 순교성인비도 보였다. 다섯 순교자는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부활한 예수상
▲ 부활한 예수상

그 밖에 해안 도로 쪽으로는 부활한 예수상이 서 있었다. 

순교터
▲ 순교터

그리고 마침내 순교터를 알리는 비(碑)가 서 있는 곳에 당도했다. 각 비마다 다섯 순교 성인이 심문 과정과 죽음을 앞에 두고 남긴 말씀과 대화가 적혀 있었다. 간략히 다섯 순교 성인의 순교 과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제5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서 번역과 저술 작업을 돕던 황석두 루카는 합덕 거더리에서 관군에게 붙잡혔고,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는 거더리로 스스로 찾아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됐다고 한다. 충북 제천에서 잡혀 온 장주기 요셉은 다블뤼 주교와 함께 형장으로 보내달라고 청해 합류했다고 한다.

고종이 신병을 앓고 있었고, 오래지 않아 국혼이 있어 서울에서 피를 보지 않기 위해 200리 밖에서 처형을 하라는 명이 떨어졌기에, 1866년 3월 29일 순교 성인 다섯 분은 심한 고문으로 인한 불편한 몸으로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250리 떨어진 충청수영 형장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의 수난일에 죽게 해달라는 안토니오 주교의 요청에 따라 안토니오 주교, 오메르트 신부, 위앵 신부, 황 루카, 장 요셉 순으로 3월 30일에 순교했다고 한다.

순교한 다섯 순교자의 머리는 사흘간 효시되었고, 용감한 신자들이 형장에 몰래 들어가 머리와 몸을 수습하여 앞에서 소개한 갈매못 모래밭에 가매장했다고 한다. 황석두 루카 회장의 시신은 약 3주 후에 가족들이 수습하여 홍산 삽터에 매장(현재 그의 무덤은 연풍에 있다) 했으며, 황석두 루카회장을 제외한 네 성인의 유해는 보령의 미산면 서짓골 성지에 16년 동안 안장됐다고 한다. 1882년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으나, 1894년 서울 용산신학교를 거쳐 1900년 서울 명동성당에 안치됐다가 1967년부터는 절두산 순교자 지하 공동묘지에 안치됐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무명 순교자를 기리는 비문을 읽어 보았다. 서울에서 처형장까지 배로 압송되던 무명 순교자들은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거나 참수 후 시신은 바다에 던져졌다는 대목에 이르니, 가슴을 옥죄는 슬픔을 누를 길이 없었다. 천주교 성지마다 가보기도 전에 주저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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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및 소강당
▲ 기념관 및 소강당

기념관 및 소성당 내부
▲ 갈매못 성지 기념전시관 및 소성당 내부

감정을 추스리고 순교터와 마주한 갈매못 성지 기념전시관으로 이동했다. 소성당으로 사용되는 기념관 내부에는 다섯 순교자들의 순교 과정이 그림으로 그려져 전시돼 있었고, 다블뤼 주교의 유품과 유물, 성인품에 오른 다섯 성인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소개되어 있었다.

순교 과정은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표현됐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처참한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감히 정면에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념관 및 소성당 내부에서 찍어온 사진을 정리하며 처형 장면과 모래밭의 효수 장면을 그린 그림은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소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성스러운 상흔은 관심을 두고 갈매못 성지를 찾는 방문객 개개인의 가슴에 묻어 기억해 주길 바라는 때문이다.

병인박해 150주기
▲ 병인박해 150주년에 다섯 성인상을 봉인했다고 한다.

승리의 성모 대성당
▲ 승리의 성모 대성당 전경

성인유해공경실
▲ 승리의 성모 대성당 오른편에 성인유해공경실이 마련돼 있다.

두 번째로 걷게 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오르니, 병인박해 150주년에 봉인한 다섯 성인상과 승리의 성모 대성당이 나타났다. 대성당 내부에는 성인유해공경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숭고한 죽음으로 믿음을 지켜내고자 했던 다섯 순교성인 앞에서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승리의 성모 대성당으로 오르는 길에 설치된 조형물
▲ 승리의 성모 대성당으로 오르는 길에 설치된 조형물

1866년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는 1873년까지 계속됐고, 1886년 한불조약을 맺고 나서야 끝났다고 한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220번에 의하면, 다섯 순교 성인의 목이 잘린 머리를 지금의 순교자비가 있는 자리에 걸어놓자, 은빛 무지개 다섯 개가 하늘에 떴다고 한다. 보령의 '갈매못 성지'를 떠나오며 생각했다. 다섯 순교성인의 숭고한 죽음은 힘없는 민초들에게 어두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비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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