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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청양 정산향교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학교

인재 양성 공립 중등교육기관 향교

2021.09.12(일) 15:52:40 | 대로 (이메일주소:dried@naver.com
               	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든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시대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으로 길러집니다.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은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왕립 학교인 고구려의 태학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학교 교육은 크게 발전하였으며, 유교를 국가의 기본 통치이념으로 삼던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맞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기관들이 발달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학교제도는 대체로 고려 말기의 학교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습니다. 관학으로는 중앙에 성균관과 학당,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고, 사학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유교 이념에 따라 인재를 양성하였고, 잡과(雜科)라고 일컫는 기술·실업 교육은 해당 관아에서 관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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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향교는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정산면 행정복지센터 가까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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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오래지 않아 정산향교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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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면행정복지센터 앞에 주차하고 걸어서 가도 되지만 정산향교 바로 옆 전통문화체험관에 주차공간이 있어서 그곳까지 진입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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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향교의 외삼문은 좀 특이합니다. 청아루(菁莪樓)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2층 누각의 아래 1층에 태극 문양의 외삼문이 나란히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모시거나 행사가 있을 때만 문을 여는가 봅니다.
하는 수 없이 담장 밖을 한 바퀴 돌며 내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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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향교는 향교 입구에 2층의 청아루가 있고, 정면에 명륜당이 있습니다. 명륜당 왼쪽에 동재가, 오른쪽에 서재가 있습니다. 서재는 오른쪽 및 왼쪽 기둥이 경내의 담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성전은 내삼문을 지나 명륜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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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은 배우는 공간인 학교인 셈입니다.
조선시대에 향교가 세워진 목적은 인재를 길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관리를 키우고 고려 시대의 불교 중심 문화에서 벗어나 유교를 조선의 중심 이념으로 세우기 위해 이를 전파하고 교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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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강당(講堂)인 대성전에서 같이 이루어졌으며, 교생들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지내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동재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서재에는 서민 학생들이 기거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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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교육과정은 시문(詩文)을 짓는 이른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경학은 경전뿐만 아니라 사서(史書)를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향교의 입학자격은 서당에서 한문과 예절교육을 받은 양반과 일반 서민의 자제로 16세 이상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향교도 중앙의 학당과 같이 생도에게 무상교육을 비롯한 각종 특전을 주어 면학을 장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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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루와 전통문화체험관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 봅니다. 날씨가 무척 화창하여 기분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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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동재와 서재의 기와·벽체·기단 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고, 서재와 청아루 사이의 시멘트 벽돌 담장을 해체하고 한식 막돌 담장으로 다시 쌓았습니다.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된 모든 부분을 해체하고 자연석으로 대체하여 자연스럽게 꾸몄습니다.
나지막한 담장에는 조그마한 쪽문이 있는데 바로 명륜당과 동재, 서재로 들어가는 문인 듯합니다. 정산향교에는 대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쪽문도 두 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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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올라가니 정산향교를 내려다보며 보호하고 있는 듯한 큰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수령이 무려 620년이니 정산향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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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행나무는 정산향교뿐 아니라 정산면 서정리 일대를 굽어살피는 듯합니다. 나무의 둘레가 6.2m, 높이가 무려 22m에 이르는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가을에 단풍이 들면 더욱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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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를 보고 담장을 따라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아보며 다시 정산향교 내부를 들여다봅니다. 명륜당 뒤로는 솟을대문 형식의 내삼문이 있고 그 뒤에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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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헌종 때 중건한 것이며, 5성(공자·안영·증자·자사·맹자), 4현(주돈이·정호·정이·주자) 및 국내 18현(설총·최치원·안유·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을 제향하고 있습니다.
대성전 옆으로 은행나무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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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뒤에서 내려다보는 정산면의 모습입니다.
정산면은 고려시대에는 정산현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 정산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서정리에는 관아가 있었으며, 보물 제18호인 정산서정리구층석탑, 충남기념물 제132호인 정산향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번창한 곳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곳의 자제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16세가 되면 중등교육을 받는 향교에 들어와서 청운의 꿈을 품고 공부하였겠지요.
향교에 입학하여 모든 과정을 마치면, 소과를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며 소과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모두 합격하면 진사나 생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진사나 생원은 과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과에도 도전하여 합격하면 나라의 관리로 임용되었습니다. 또한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이 있어 이를 위해 입학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해요.

향교는 조선시대에 국가로부터 토지·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을 많이 가르쳤으나,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의 발달과 향교 교육에 대한 양반들의 외면 등으로 인해 점차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이 쇠퇴하여갔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 기능은 잃고, 제향 기능만 남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에 들어서 인성과 전통교육에 대하여 다소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육 기능도 다소 회복되고 있습니다. 정산향교에는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하면서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전통문화교육에 힘쓰고 있습니다.

<정산향교>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칠갑산로 1849-28
041-940-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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