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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순신 백의종군길을 걸으며 생각하며

2020.12.09(수) 17:20:42 | 설산 (이메일주소:ds3keb@naver.com
               	ds3keb@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한 이때 이순신 백의종군길을 걸어보고 싶어 출발지점인 현충사에 왔더니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이 많은 사람 중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장군의 사당에 나라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기 위해 찾아온 이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출발지점인 현충사 현충문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출발 지점인 현충사 현충문
 
주차장 한곁에 유명한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라 새겨진 돌탑이 서 있다. 1597년 9월 15일 명량해전에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뒤 목숨을 건 싸움을 앞둔 병사들에게 “더 이상 살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라”, 외치는 영화의 한 장면 속 장군을 떠올린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글이 새겨진 돌탑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가 새겨진 돌탑
 
현충사 입구 버스정류장 뒤뜰에는 붉은 산수유가 모두가 사라진 겨울 뜨락을 장식하고 화려했던 날들을 보낸 곡교천 은행나무길의 은행나무들은 긴 겨울의 고요 속에 묻혀 있다.
 
현충사 입구 버스 정류장
▲현충사 입구 버스정류장
 
현충사 뜨락의 산수유 열매
▲현충사 뜨락의 산수유 열매
 
‘이순신 백의종군길’은 장군께서 1957년 1월 14일 정유재란에서 일본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왕의 출정명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1597년 4월 1일 옥에서 풀려나 의금부를 출발하여 아산에 들렀다가 남원, 구례를 거쳐 합천의 초계 도원수진에 이르기까지 걸었던 길과 활동 범위 등 약 640km의 경로를 말한다.
  
아산의 이순신 백의종군길은 총 3개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의종군길은 장군께서 한양을 떠나 본가가 있는 아산에 들어온 1597년 4월 5일부터 다시 남행에 나선 4월 19일까지 장군께서 지났던 경로를 말하는데,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제2구간 ‘효의 길’은 아산시에서 올해 조성을 마무리하였으며 내년에는 제1구간 ‘백의종군 오신 길’, 제3구간 ‘백의종군 가신 길’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아산으로 오시는 어머니를 만나러 현충사 본가에서 인주면 해암리 게바위나루까지 장군께서 다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길 중 지금은 차도가 되어버린 일부 구간 대신 곡교천 둑방길로 이어지는 걷기 좋은 15㎞ 구간을 조성하여 ‘효의 길’로 명명하였다.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제2구간 ‘효의 길’ 안내도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제2구간 ‘효의 길’ 안내도

아산대교 다리 밑을 지나다 보니 장군께서 어머님과 마주한 장면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오랜만에 집과 선산이 있는 아산에 왔지만, 죄인의 몸에다 하늘처럼 여기던 어머님이 여수에서 아산으로 오는 배 안에서 돌아가셨으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떠나야 하는 효심 깊은 장군에게 이 길은 고통과 슬픔의 길이었을 것이다.
 
아산대교 효의 길 벽화
▲아산대교 효의 길 벽화
 
마른 갈대와 억새 사이로 아산그린타워가 보이는 길을 따라 걸으며 백의종군길에 장군께서 아산에서 보낸 보름은 한 인간으로서 만감이 교차하는 회한과 고뇌의 시간이었을 것이고 억장이 무너졌던 통한의 시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떠난 장군께서는 그 날 이후 살아서 다시 고향 땅에 돌아올 수 없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애달퍼진다.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전망대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전망대
 
백의종군길을 걷는 사람들
▲백의종군길을 걷는 사람들
 
곡교천 자전거 길
▲곡교천 자전거길
 
두 시간 넘게 걸어 도착한 중방포는 당시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지점으로 장군께서 게바위나루에서 사흘을 머물며 어머님의 시신을 입관한 뒤 배로 이곳 중방포까지 와서 영구를 수레에 모신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백암리 본가까지 육로로 운반했던 모양이다.이날을 장군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4월 16일(5월 31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비는 퍼붓고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라고.
 
중방포
▲중방포
 
강청교를 지나 직선으로 나 있는 곡교천 둑방길에는 전봇대가 일렬로 도열해 있고 둑방에는 생명을 다한 마른 망초꽃이 가득하다. 햇살이 설핏한 하늘에는 집 찾아가는 기러기가 일정한 대형을 이루며 공중을 날고 마지막 쉼터에 도착하니 하늘에 고운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데 나는 또 '이별의 노래'가 중얼거려진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곡교천 둑방의 마른 망초꽃
▲곡교천 둑방의 마른 망초꽃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마지막 쉼터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마지막 쉼터
 
일정한 대형을 이루며 하늘을 나는 기러기
▲일정한 대형을 이루며 날아가는 기러기
 
마지막 쉼터에서 게바위나루까지는 10분 남짓한 거리, 설핏하던 햇살은 금방 붉어지기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423년 전 이곳 게바위나루에서 백의종군의 명을 받은 몸으로 싸늘하게 식은 어머님의 시신을 부여안고 오열했을 장군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장례를 다 치르지 못하고 남으로 길을 떠나야 하는 장군의 심정은 또 어떠하였을까.
 
게바위 나루로 가는 표지판
▲게바위나루로 가는 표지판
 
게바위에 있는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안내도
▲게바위에 있는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안내도
 
게바위
▲게바위
 
게바위 나루(쉼터)
▲게바위나루(쉼터)
 
'행록(行錄)'에는 그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다가 이미 죄가 여기에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였으나 어버이 또한 돌아가셨구나, 라고 대성통곡하며,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라고 울부짖었다” 
  
걷고자 했던 길을 다 걸었지만, 웬일인지 차를 불러 휑하고 돌아오기가 편치 않아 우리는 다시 뒤를 돌아 강청교까지 걸었다. 그 길 위에 붉은 노을이 퍼지고, 시나브로 어둠이 내린다.
 
붉은 노을에 물든 이순신 백의종군길
▲붉은 노을에 물든 이순신 백의종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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