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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개화기 자주근대화에 앞장섰던 김옥균선생유허지를 찾아!

2020.06.18(목) 23:59:49 | 초록나무 (이메일주소:buykks@hanmail.net
               	buykks@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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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역사인물 탐방코스로 대한제국 말의 정치가이자 개혁사상가였던 김옥균선생유허지를 찾았다.
 
김옥균선생유허지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에 위치해 있다. 유허지란 역사적 사실이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그 장소에 유물이나 문화재 등이 전혀 없는 곳을 말한다. 김옥균선생유허지가 있는 아산1리 마을에는 아산향교, 여민루, 영인산자연휴양림 등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을 코스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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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선생유허지는 1976년 12월 6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김옥균(1851~1894) 선생의 묘소는 영인산을 병풍처럼 등지고 아산1리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유허지 주차공간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니, 김옥균 선생을 모신 묘지와 사당, 고즈넉한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말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고균 김옥균 선생!
 
갑신정변은 비록 3일 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개혁 시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록 외삼문이 굳게 잠겨 있어 사당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갑신정변이란 역사적 사건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유허지에는 유적 건조물과 봉토묘 형태의 무덤과 기념비 그리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한때 높은 관직에 있었던 개혁가의 묘소로 보기에는 다소 쓸쓸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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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선생의 본관은 안동, 호는 고균, 시호는 충달로 1851년 1월 23일(조선 철종 2년), 지금의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났다. 출생지인 정안면 광정리는 김옥균선생유허로 충청남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김옥균은 학문뿐만 아니라 문장과 시, 글씨,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했다고 한다. 3세 때는 가족이 지금의 천안시 광정면 원대리로 이사했고, 7세 때는 재종숙인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1861년)에 양부인 김병기가 강릉부사가 되자 양부를 따라 강릉으로 가 16세 때까지 율곡 이이의 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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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양반 출신 청년 지식인들과 함께 개화사상을 배우게 되었다. 고종 9년(1872)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874년 홍문관교리로 임명, 여러 직책을 거치며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1881년(고종 18)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명치유신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오는 도중에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 관료는  서서히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고, 청의 간섭을 받아들이는 온건 개화파와 이에 반대하는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다. 오직 부강한 근대국가를 이루는 것이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는 길이라 믿고, 개혁을 실천하고자 하였던 김옥균은 1884년 10월 17일(음력), 급진 개화파의 중심인물이었던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과 함께 우정국 개국 연회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켜 새로운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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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이란 1884년 갑신년에 김옥균을 비롯한 조선의 급진 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을 말한다. 갑신정변을 일으켜 고종의 신병 확보와 보수세력 숙청 등을 통해 과감하게 개혁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청나라의 무력 진압으로 결국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이 실패하자 홍영식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 일원들이 이 과정에서 반역자로 처단되었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김옥균은 10년간 일본 각지를  떠돌다가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그곳에서 수구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청나라에 의해 국내로 이송된 시신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으나 갑오경장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후, 김홍집 등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追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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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경 아오야마에는 김옥균 선생의 위패만 있고, 신죠지에는 머리가 묻혀 있다고 한다. 김옥균선생유허는 1914년 선생의 아들 김영진이 아산 군수로 있을 때 현재의 위치에 만들었으며 선생의 옷과 머리카락을 이장하여, 정경부인 유씨와 합장한 것이다.
 
아산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개화기 풍운아로 살다간 김옥균 선생의 유허지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비록 외세의 힘을 이용해 부국강병을 꾀하려 했지만 신분제 철폐를 통해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는 나라를 위한 선조들의 충의는 한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인근에 위치한 영인산자연휴양림에서 산책도 즐기고 아산향교와 영인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여민루까지 두루두루 살펴보면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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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선생유허지
-소재: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고균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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