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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예덕상무사보부상유품전시관, 보부상에 관하여

2019.02.18(월) 10:55:57 | 쟈스민 (이메일주소:mee0102@naver.com
               	mee0102@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덕상무사보부상유품전시관보부상에관하여 1

예산에는 조금 특별한 전시관이 있다. 요즘에도 전통시장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어떻게 물건을 사고 팔았을까? 자급자족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훨씬 이전에는 여러 시장을 돌면서 물건을 팔던 장돌림이 그 역할을 대신했을 것이다. 더 정확히는 보상(봇짐 장수)과 부상(등짐 장수)을 합친 보부상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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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예덕상무사 보부상유품전시관이 보부상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예덕상무사는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당진 면천까지 맡아 주관했던 상거래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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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덕상무사의 기원은 "이성계 장군이 함경도 만호로 있을때 여진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은 것을 부상 백달원 선생이 발견하여 치료하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인연으로 보부상이 조직되고 예덕상무사까지 꾸준하게 발전해 왔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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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은 초기에는 방문 판매를 하다가 인구의 증가와 생활의 향상으로 시장을 중심으로 거래가 되고 시장이 번창하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전국 팔도를 연결하는 통신수단이었다. 전시에는 군사물자를 운반하거나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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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부상 백달원 선생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운 공으 조직이 가장 크게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경제권이 빼앗겨 조직이 흩어졌으며 광복과 더불어 일시적으로 활기를 띄다가 빠른 경제성장으로 점차 쇠퇴하면서 이제는 보부상이 없는 시장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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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이 가장 번성하였던 조선시대 시장의 모습을 디오라마로 전시해 놓았다. 짚신장수, 옹기장수 등 있을건 다 있고 없을건 없는 우리네 과거 시장에서 보던 다양한 보부상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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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의 모습은 시대극 영화나 드라마, 오래된 사진에서 가장 많이 보았겠지만 문학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아낙네의 애타는 심정이 그려진 백제가요 <정읍사>와 이효석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에서도 장꾼의 애환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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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의 가장 중요한 행동강령에는 조동모서(아침저녁으로 동서로 뛰며 부지런히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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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구사장(병든자는 치료해주고, 죽은 자는 장사 지낸다), 환난상구(어려움에 처하면 십시일반으로 서로 돕는다)가 있다. 벌목조항도 있어 장사 이전에 사람된 도리를 다하자는 것이 먼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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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돌림 유진룡씨를 마지막으로 보부상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행히 그를 통해 옛 보부상들이 펼쳤던 여러 행적, 도덕과 윤리, 애환과 생리, 보부상의 유품들이 전해질 수 있어 그들의 자료를 볼 수 있었던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예덕상무사보부상유물전시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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