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공세리 성당과 공세리 마을 이야기

파란 눈의 신부가 세우고 34년간 공세리 마을서 지내

2018.07.26(목) 23:52:03 | dreamyoung (이메일주소:kge0227@nate.com
               	kge0227@nate.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세리성당과공세리마을이야기 1

아산 공세리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마 공세리 성당일 것이다.
경관이 아름다워 각종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알려진 곳으로 마을도 아담하니 공세리 성당과 분위기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에는 울긋불긋 물든 아름다운 단풍 풍경이, 겨울에는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설경이, 봄에는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초록을 그리고 여름에는 시원한 녹음이 기대되는 곳이기도 하다.

공세리성당과공세리마을이야기 2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는 마을의 분위기로 봐서는 가까이에 호수나 바다가 연상되지 않는 내륙의 아담한 마을 같다.
짧지만 아득한 오름길을 오르면 곧 보이는 공세리 성당은 사실 조선의 조세미 창고였다. 이를 알리는 표지석의 설명을 보고 나서 주변을 살펴보며 경내를 거닐어본다.

공세리성당과공세리마을이야기 3

고종 때 조세 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당시 마을의 어느 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던 파란 눈의 드비즈(에밀리오) 신부가 창고 건물을 헐고 구 본당과 사제관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1922년 본당이 완공되면서 충청남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본당의 설계는 에밀리오 드비즈 신부가 직접 한 것이며 신부 또한 공세리 마을에서 34년 동안의 삶을 같이 했다.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길 10 공세리성당
▲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길 10 공세리성당

프랑스가 고향인 신부는 성당을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하여 그 이국적 풍광을 자랑한다.
주변 숲속 산책로와 함께 어우러진 공세리 성당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산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드비즈 신부는 오랜 세월 공세리에 머물며 이 지역의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신부가 한방의술을 활용해 직접 제조한 고약은 처음에는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 고약이라 부르다가 드비즈 신부의 심부름꾼이었던 이명래에게 전수되면서 이명래 고약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알 수 있었다.

공세리성당과공세리마을이야기 4

조선 시대 후기 천주교 신앙의 요충지였던 내포지방의 입구로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포구였던 공세리, 그리하여 병인박해 때 순교한 32명의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공세리성당과공세리마을이야기 5

충청남도 천주교 순례길 중  공세리 성지 성당에서 솔뫼 성지까지 제 1 구간에 해당되는 순례길로 간간이 찾아오는 성지 관광객들과 예쁜 사진을 찍으러 삼삼오오 도착하는 가족이나 친구 일행들이 보인다. 

공세리성당과공세리마을이야기 6

공세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들도 참 많다.  350년 이상의 보호수가 4그루나 되고 거목들이 울창하다.
그 긴 세월 동안 이곳에서 터를 잡고 자라난 나무들 못지않게 공세리에는 문화재인 공세리 곶고지의 흔적도 있다.

공세리성당과공세리마을이야기 7

처음에는 창고 없이 노적하였다가 중종 18년에 창고 80칸을 건축하였고 지금은 그 창고 터만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해운판관을 두어 관리케 하였는데 삼도해운판관비 총 8기가 그 골목에 서있다.
조선의 조세 창고와 외세의 새 종교 신당인 공세리 성당, 지금은 조선 조세 창고는 사라지고 그 성당 만이 공세리를 지키고 있다.
 

 

dreamyoung님의 다른 기사 보기

[dreamyoung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