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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고대 오사카에 피어난 백제인의 개척정신

일본 속 백제이야기 (4) 박재용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

2018.05.09(수) 10:30:18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오사카의 사야마이케(狹山池) 전경

▲ 오사카의 사야마이케(狹山池) 전경



고대오사카에피어난백제인의개척정신 1


오늘날 오사카는 일본의 교통·관광의 중심지이자 국제적인 상업·무역의 도시이다. 그런데 고대에는 상습적인 범람과 가뭄 등의 자연재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사람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던 곳이 일약 비옥한 평야로 탈바꿈하면서 국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핵심 지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 배경은 바로 백제 토목 기술을 기초로 축조된 사야마이케(狹山池) 조성사업이었다.
 
사야마이케는 일본 최초의 댐식 인공저수지로, 616년에 완공되었다. 강의 상류를 제방으로 막아 하류지역의 광대한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주요 수원지 역할을 했다.
 
오사카 지역은 대부분 지반이 약해 제방을 쌓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전에는 자연스럽게 계곡 사이를 막아 용수를 확보함으로써 인력의 절감과 기술상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러다가 백제로부터 선진 토목기술이 전해지면서 사야마이케를 축조하여 안정적으로 용수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도입된 것이 부엽(敷葉)공법이다. 부엽공법은 흙을 한 층 쌓고 그 위에 나뭇가지와 낙엽 쌓기를 반복하는 공법으로, 주로 저지대나 습지에서 쓰였다.
 
서울 풍납토성과 김제 벽골제, 부여 나성 등의 축조에도 부엽공법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그렇게 수준 높은 토목기술이 없었다. 즉 선진적인 토목기술을 가진 백제인들이 직접 이주해 오지 않았다면 사야마이케의 축조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이 공사에는 백제인들이 가진 새로운 관개 기술도 적용되었다. 사야마이케에 저장된 물을 근처 마을로 보내 주는 수로가 개발된 것이다.
 
그 결과 저습지였던 오사카 일대는 막강한 농업생산력을 갖춘 비옥한 농경지로 탈바꿈하여, 이전에 비해 그 생산력이 3배 이상 늘어났다. 일본에서도 농업혁명의 시기라고 부를 정도로 가히 기적적인 결과였다.
 
오사카를 고대 일본 경제의 중심도시로 만든 일등 공신이 바로 백제인과, 그들이 지니고 있던 선진적인 기술력이었던 것이다.
 
고대 일본의 성씨록인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오사카 지역의 68씨족 중 48씨족이 한반도 출신이고, 이 가운데 백제계 씨족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만큼 백제인들은 이곳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갔고, 그 정신과 산물은 오롯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사야마이케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수리를 거듭했지만, 그 진정성과 완정성은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유산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백제인들의 토목기술이라는 비옥한 토양이 있었기에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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