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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3.1만세운동 한복판에 선 김원벽 선생

독립기념관 기획전시장 독립운동가 소개

2018.04.09(월) 11:15:21 | 와이파이초코파이 (이메일주소:zoomsee8616@naver.com
               	zoomsee8616@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31만세운동한복판에선김원벽선생 1

천안독립기념관 전시장 4관과 5관 사이 통로에는 매월 독립운동가 소개 코너인 기획전시장이 있습니다.
매달 선정된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을 통해서 독립운동은 특정한 개개인이 아니라 많은 숨은 공로자와 함께 일궈낸 대한민국 국민의 모두의 활약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요.
지난 3월의 독립운동가인  '3 · 1 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 김원벽 선생을 소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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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속 시대를 살아간 젊은 지성인 김원벽!

3 · 1 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로 소개되고 있는 김원벽 선생은 황해도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아들로 태어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여 그 당시 지성인으로 대변되는 분이셨습니다.
김원벽 선생이 스물다섯 살 젊은 청년이었을 당시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일본의 10년 가까운 무단 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31만세운동한복판에선김원벽선생 3

1918년 제1 차 세계 대전이 끝이 나고 미국을 포함한 유럽의 각 나라들은 세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파리에서 회의를 열게 됩니다.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의 자극을 받아 우리나라 일본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2.8독립 선언을 외치며 조선의 독립 선언을 합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종교계 지도자 중심의 33인 민족 대표를 구성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하기로 합니다.
그러던중 1919년 1월 18일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일본 제국주의의 독살에 의문을 품고 고종의 장례식 전 만세운동을 계획합니다.
그리하여 3월 1일 인사동 태화관 앞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 선언을 낭독하는 동시에 종로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립 선언식을 올리고 만세 시위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 사람이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또한 세계 모든 나라에 이 선언을 알려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는 것을 똑똑히 밝힌다. 그리하여 자손 대대로, 민족의 정당한 권리를 누리도록 할 것이다!


이때 김원벽 선생은 만세운동의 조직적 추진을 위해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으며, 독립선언서 운반과 배포 장소를 학교별로 정하였습니다.
아울러 학생대표를 중심으로 2차 만세시위를 3월 5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탑골공원에는 선언서를 낭독하자 곳곳에서 울분의 만세 함성이~

역사적인 3월 1일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3월 5일 2차 만세 운동 그리고 도시에서 시작하여 농촌으로 학생과 지식인, 종교인으로 시작해서 농민과 노동자까지 번져나간 3.1 만세 운동의 열기는 만주, 연해주, 미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에서 만세 시위에 동참하게 됩니다. 
시위 첫날만 1만여 명이 체포되거나 총을 맞거나 주동자는 사형이 처하기도 했지만 3월에 시작한 만세 시위는 5월 중순까지 계속해서 넓고 깊게 번져나갔습니다. 

31만세운동한복판에선김원벽선생 4

김원벽 선생은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광장에서 2차 만세 시위로 결국 체포되어 부상을 입고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2년후 만기 출옥하였습니다. 그후 잡지와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폐간되는 등 실패를 거듭하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 1928년 35세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원벽 재판기록
▲ 김원벽 재판기록

17명의 민족대표들과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는 기사
▲ 17명의 민족대표들과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는 기사

민족 대표 33인뿐만 아니라 태극기를 들고 직접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학생, 노동자 등 국민들이 모두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였을 그 당시 그분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의 우리나라는 존재하고 있었을까요? 오래간만에 청명한 하늘 아래 따뜻한 봄기운이 퍼져있는 독립기념관에서 3.1운동 그 당시의 울분에 찬 만세 함성을 떠올리며 살짝 소름 돋는 전율을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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