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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4월 1일은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부르던 날

유관순 열사의 발자취를 따라

2018.04.01(일) 22:08:16 | 충남희망디자이너 (이메일주소:youtae0@naver.com
               	youtae0@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4월 1일은 만우절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장난을 쳐도 기분좋게 넘어가는 날입니다. 또한 99년 전 봄, 아우내 장터에선 유관순 열사가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한 날이기도 합니다.
 
유관순 열사 기념관 동상
▲ 유관순 열사 기념관 동상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유관순은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왔습니다. 유관순은 부형들을 설득하며,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계획했습니다.

유관순 열사 생가
▲ 유관순 열사 생가

유관순 열사 생가는 기념관에서 1km 남짓 떨어진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적 제230호로 지정된 이곳은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만세운동 당시 일본 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된 것을 1991년 12월 30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의거 전날인 1919년 3월 31일 밤 다음날(4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렸습니다.

유관순 열사 사적 봉화탑
▲ 유관순 열사 사적 봉화탑

당시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천안·안성·진천·연기·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습니다. 이곳은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 숭고한 뜻을 후세에 널리 선양하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했고 매년 2월 말일에 봉화를 올려 그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2017년 유관순 열사 기념행사에서
▲ 2017년 유관순 열사 기념행사에서

거사 당일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동지들이 아우내 장터로 모여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군민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에는 유관순 열사가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연설을 하자 수많은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열여덟 살 소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대의 총칼에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지만 소녀는 물러서지 않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4월1일 아우내 장터
▲ 4월1일 아우내 장터

1일과 6일은 아우내 장날입니다. 아우내는 ‘2개의 내(개천)를 아우른다’는 뜻으로 충남 천안 병천면의 한글 이름입니다. 지금도 1일과 6일이면 어김없이 장이 서고 있습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유관순은 재판을 받는 것도 거부한 채,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일본의 잘못을 강력하게 항의습니다. 유관순은 감옥에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1920년 9월 28일 
감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18살이었습니다.

유관순 열사 초혼묘
▲ 유관순 열사 초혼묘

1920년 9월 28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여 이화학당의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 후 그곳이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이게 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중 흔적도 없이 망실되었습니다. 이에 1989년 10월 12일 유관순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묘(招魂墓; 유골이 없는 분의 혼백을 모신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항거는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날의 기억과 이상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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