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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병자호란의 영화 '남한산성' 그리고 당진 남이흥 장군

병자호란을 부른 정묘호란때 적군을 맞아 장렬하게 폭사 순절한 조선 최고의 충신

2018.02.12(월) 15:26:28 | 이종섭 (이메일주소:dslskj55@hanmail.net
               	dslskj55@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작년 가을에 상영되어 최근까지 아주 큰 히트를 한 영화 ‘남한산성’을 다 알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본 대작이었고 흥행도 크게 성공해 지방의 일부지역에서는 여전히 상영중인걸로 안다.
이 영화는 소설가 김훈씨의 작품 <남한산성>을 원작으로 한 것이고 그 내용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굴욕을 맞이하기까지 47일간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치욕을 참고 항복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과 치욕을 견디고 사느니 끝까지 항전하여 죽음을 택하자는 척화파인 김상헌의 갈등, 그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조의 갈등을 다룬다.
결국 인조가 청태종 앞에 나가 머리를 숙이며 항복하는 것으로서 끝나는데 이는 한민족의 고대사에 있어서 참으로 기억하기 싫은 치욕의 역사의 한 장면이다.
 
도민리포터가 오늘 이 기사를 포스팅 하는 이유는 이 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었던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항복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전 이미 병자호란을 예고한 정묘호란이 일어났는데 그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아주 중요한 인물이 우리 충남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묘호란 당시 그때 제대로 대처했다면 병자호란 같은 민족적 수치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정묘호란때 이미 그전부터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등을 겪으며 국방이 쇠퇴해진 까닭도 있어 더 큰 아쉬움을 자아낸다.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사당.

▲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사당과 기념관, 묘지 일원.


남이흥 장군의 유품을 보관 전시중인 모충관

▲ 남이흥 장군의 유품을 보관 전시중인 모충관


성역 일원에 만들어져 있는 활터

▲ 성역 일원에 만들어져 있는 활터


남이흥 장군 묘 일원

▲ 남이흥 장군 묘 일원


우선 병자호란부터 살펴보자.
병자호란은 정확하게 의주 부윤 임경업이 청병의 압록강 도하와 진격을 목격하고 장계에 적은 날짜, 즉 공식적으로 병자호란 발발이 명시된 날짜는 음력 12월 9일이었는데 이 날은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4일이 된다.
그리고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인조가 끝내 항복한 날짜는 1637년 음력 1월30일,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그해 2월24일이다.
그러니까 381년전 1월부터 2월까지 딱 이맘때 조선에서는 가장 치욕적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기는 하지만, 청태종에게 인조가 무릎을 꿇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정묘호란이 먼저 일어났다.
이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가 1627년 1월이었고 그 시기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년전이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당시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혹은 그후 국방과 외교를 바르게 했더라면 병자호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오늘 기사를 쓰는 것은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당시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3만 6000명의 후금 군사를 맞아 안주성에서 고작 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혼신을 다하여 대적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성이 불가하자 적군을 화약고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 뒤 화약에 불을 붙이고 성 안으로 들어온 많은 적들과 함께 자폭하여 순절했던 장군이 있었다.
 
바로 충남 당진의 남이흥 장군.  
 

남이흥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

▲ 남이흥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


정려의 편액

▲ 정려의 편액


안주는 원래 서북의 요충지로 수만명의 상비병력을 보유하는 병영이었지만 이괄의 난으로 모두 없어지고 텅 빈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후금군이 내려왔고 다급해진 남이흥은 평안감사에게 장계를 보내 증원군을 요청하고 인근의 모든 병사와 민간인까지 끌어모아 겨우 3000명 병사를 채웠다.
하지만 절대 열세였던 조선군은 중과부적이었고 최후의 순간이 왔다고 판단한 남이흥 장군은 준비해 놓은 화약고에 불을 붙여 수많은 적군과 함께 한꺼번에 자폭하며 장렬하게 순절했다.
이렇게 해서 정묘호란의 첫 방어선이던 안주성이 무너져 내렸다. 이때 남이흥의 나이 52세였다.
안주성에서 벌인 남이흥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최후항전은 후금군에도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주어 당시 후금군 장군은 성안에서 패잔병을 죽이는 부하들을 말렸고, 수백명의 포로를 석방했을 정도라 한다.
 
나중에 정묘호란이 끝난후 남이흥의 장례는 인조의 명에 따라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임금이 친히 참석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관을 덮었다고 한다.
남이흥에게 내려진 사패지(賜牌地 - 공신에게 내려진 토지)는 당진군 대호지면 전부와 정미면 일부가 포함되는 엄청난 넓이였다. 현종 때인 1663년에는 충장공이란 시호도 내려졌다. 숙종 6년에는 안주에 사당을 지어 충민사라는 사액을 내리기도 했다.
그 충민사가 지금의 남이흥장군 사당이 있는 곳이다.
 

남이흥 장군의 유품을 보관 전시중인 모충관

▲ 남이흥 장군의 유품을 보관 전시중인 모충관. 현재 종손 남주현 선생께서 관리하고 있다.


전시관 내부. 왼쪽의 거대한 목곽은 남이흥장군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 전시관 내부. 왼쪽의 거대한 목곽은 남이흥장군의 무덤에서 나온 관이다. 겉부분을 회벽으로 둘러쳐 지금까지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고 하니 놀랍다.


곤룡포 등도 전시중이다.

▲ 곤룡포 등도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도 전시중이다.


병자호란의영화남한산성그리고당진남이흥장군 1


남이흥 장군 초상화

▲ 남이흥 장군 초상화


병자호란의영화남한산성그리고당진남이흥장군 2


병자호란의영화남한산성그리고당진남이흥장군 3


진무원종록권

▲ 진무원종록권


인조가 내린 교지

▲ 인조가 내린 장군의 무과급제 등 교지


장군의 뜻을 기려 조정에서 남이흥 장군의 일가에게 토지와 노비 등을 내려준 것 등을 기록한 사패절목

▲ 장군의 뜻을 기려 조정에서 남이흥 장군의 일가에게 토지와 노비 등을 내려준 것 등을 기록한 사패절목


장군이 사용하던 호패등.

▲ 장군이 사용하던 호패등.


장군이 사용한

▲ 장군이 사용한 활과 화살, 화살통. 이것은 종손 남주현 선생이 고택을 수리하기 위해 마루 밑바닥을 정리하던중 우연히 발견한것이라 한다.


장군이 사용한 활집

▲ 장군이 사용한 활집


충장공 남이흥 장군은 1576년 남주목사 남유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남유도 유명한 무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 출전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사흘 후인 1598년 11월22일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당시 아버지의 전사를 계기로 글공부를 포기하고 활쏘기, 말타기에 전념해 27세이던 1602년에 무과해 급제했다. 이후 선진관, 포도대장, 경상병마절도사, 안주목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49세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였고 정묘호란때 순절한 것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그 아들은 정묘호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순국해 아버지와 아들이 2세대에 걸쳐 충신임을 기려 '양세충신정려'가 내려졌다.
 
현재 당진의 충장사는 남이흥 장군과 그의 부친 남유 장군을 기리기 위해 1667년(조선 헌종 8) 왕명으로 건립된 붙천지위(不遷之位) 사당이다. 불천지위를 받으면 장자에게 그 지위가 세습되며, 그 후손들은 신위를 옮기지 않고 영구적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충장공이란 시호(諡號,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특별한 이름)를 받은 인물은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권율 장군, 의병장 김덕령 장군 등 13명 정도뿐이라 하는데 그중 조정에서 토지와 노비 등을 주어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불천지위를 내린 사례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남이흥 장군의 유품은 녹피방령포와 녹피바지, 활, 화살, 상아, 나무, 녹각 등으로 만든 호패 6점 등이 있다.
그 외에 급제교지(1602년), 교서, 추증교지, 지휘봉, 화살통, 등이 있다.
특히 남이흥 장군의 관복본 초상화는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래도 17세기 관복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무관의 사자흉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한다. 그 외에 녹피 복식류라든가 활과 관련된 시복과 궁대 등은 무관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당진시와 남이흥장군 기념사업회는 남이흥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에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충장사 위치 :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도이리 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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