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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금산 진산성당, 국가문화재 지정된거 모르셨죠?

한국 최초의 일반인 순교자 윤지충과 신해사옥의 아픈 역사 간직한 곳

2017.11.28(화) 23:48:10 | 권혜주 (이메일주소:skwovlf12@hanmail.net
               	skwovlf12@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신부로서 최초로 순교한 분은 당진의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이시다.
종교에 관심있는 분들, 특히 천주교 신자분들이라면 다 아는 일일텐데 그렇다면 우리나 최초의 일반인 순교자는 누군지, 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인지 아시는 분?
이 역시 충남 금산의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라는 분이며 그분들이 순교한 날 역시 당시 이맘때쯤이었던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이다.
 
그런데 오늘 기사를 포스팅 하는 진짜 의미는 최초의 순교자이자 이분들이 선교활동을 했던 금산의 진산성당이 지난 5월에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682호로 지정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고, 그가 선교활동을 했던 곳이 국가로부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진산성당을 취재했다.
 
이번에 문화재로 지정된 천주교 진산성지 성당
▲ 이번에 문화재로 지정된 천주교 진산성지 성당

성당 정면 모습
▲ 성당 정면 모습

이번에 등록 문화재로 결정된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의 유래는 이렇다.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안동 권씨가 사망했다. 권씨는 아들과 함께 이 진산성당(당시에는 성당의 규모처럼 큰 건물이 아닌, 작은 공소 정도의 크기)에서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였고, 아들로부터 천주에 대한 교육을 받아 신심이 깊었던 권씨는 아들 윤지충에게 자신의 장례를 유교식이 아닌 서학식으로 해달라고 유언하였다.
이에 윤지충은 어머니의 동생이었던 권상연과 상의하여 유교식 장례를 폐하고 서양식 장례로 치뤘다. 그런 의미로 신주를 불태웠는데...
 
이것은 당시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패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은 대형 사건이었다.
 
유교적 장례풍습을 따르지 않아 패륜과 불효로낙인찍혀 순교당한 윤지충(왼쪽)과 권상연(오른쪽)
▲ 유교적 장례풍습을 따르지 않아 패륜과 불효로낙인찍혀 순교당한 윤지충(왼쪽)과 권상연(오른쪽)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사실을 기록한 성지의 안내문
▲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사실을 기록한 성지의 안내문

이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로 인해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회유책으로 천주교 서적을 없애고 자수한 이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전국에 붙게 되었다.
그 후진 윤지충과 권상연은 피신을 했지만 윤지충의 숙부가 볼모로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두 사람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것이 신해사옥이다.
 
당시 그를 체포, 참수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금산진산성당국가문화재지정된거모르셨죠 1

금산진산성당국가문화재지정된거모르셨죠 2

성모마리아상
▲ 성지의 조각상. 윤지충의 어머니를 형상화 한듯...

성지내 자연석 조형물
▲ 성지내 자연석 조형물

조형물에 새겨진 부조
▲ 조형물에 새겨진 부조. 윤지충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권상연을 뜻한다.

성당 첨탑이 그때의 엄혹했던 박해의 순간을 기억하는 듯...
▲ 성당 첨탑이 그때의 엄혹했던 박해의 순간을 기억하고 말하려는 듯...

성당 뒷 부분에서 본 모습이다.
▲ 성당 뒷 부분에서 본 모습이다.

성당의 옆 출입문. 작고 아담하다.
▲ 성당의 옆 출입문. 작고 아담하다.

낡고 오래된 옛날식 창문. 그러나 페인팅으로 칠해놔 잘보존되고 있다.
▲ 낡고 오래된 옛날식 목재 창문틀. 그러나 페인팅으로 칠해놔 잘보존되고 있다.

성당 내부
▲ 성당 내부. 곧게 서 있는 기둥들이 전형적인 옛날식 예배당 모습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조선의 지배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는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서학에 대해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조선의 지배 체제와 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와 정통사상이었던 유교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충돌로 인해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탄압을 받은 신도들은 저마다 교우촌을 형성하여 숨어살았고, 이후 조선조정의 천주교 박해는 확대되었다.
 
그후 한참이 지난 후 이같은 사실을 전해 들은 박 파르트네라는 프랑스 신부가 1927년 진산성당을 제대로 건축했다. 정면3칸, 측면6 칸의 목구조로 전면에 돌출된 종탑이 있었지만, 1983년 종탑을 철거하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종탑과 부속실을 재축하였다.
내부는 3랑식 2고주 5량 구조이며, 초기 성당의 성격에 따라 벽제대와 난간이 잔존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본 건물은 공소이지만 건물의 격은 성당과 같다.
공소란 규모가 큰 성당처럼 신부가 상주하거나 하는 시설이 되지 못한채 미사를 드리거나 종교적 의식을 위해 만든 작은 처소를 말한다. 이를테면 강당 정도의 크기와 의미다.
 
초기 한식목구조(절충식)의 고유한 양식 및 의장적 요소가 대부분이 원형을 보존되고 있어,
근대시기 성당건축의 특징적인 요소가 되는 부위를 확인할 수 있다.
건축적인 측면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큰 곳이라 할 수 있다.
성당은 건축적인 측면과 더불어 순교의 역사에 따른 신앙의 중심의 장소로도 보존가치가 크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를 기리는 비석.
▲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를 기리는 비석.

진산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첫 참수 순교자인 복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나고 자라서 천주교 복음활동을 한 곳일 뿐 아니라, 진산 지역 많은 순교자들의 삶을 되새기는 곳이다.
또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를 했던 전라북도 전주는 조선시대의 전라감영이 있었던 곳인데 이같은 두사람의 선교활동 덕분에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는 천주교 성당이 세워졌다.(사적 제288호)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전주교구의 중심성지가 되고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되었다.
 
현재 진산성당은 여전히 천주교의 교리를 전파하며 성지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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