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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금산 백령성, 국가문화재 지정신청 했어요

지정땐 성곽복원·관광자원화 가능… 금산의 명소 되길 소망

2017.11.09(목) 15:47:22 | 내사랑 충청도 (이메일주소:dbghksrnjs6874@hanmail.net
               	dbghksrnjs687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에는 삼국시대 삶의 터전인 백제땅을 지키기 위해, 혹은 삼국 통일후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축조한 성곽이 많다.
대표적으로 서산 해미읍성을 비롯해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보령 충청수영성, 금산 백령성 등이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성곽만도 수십개에 달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표적인 성곽 중 금산 백령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충남도민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많이 알고 찾아오는 명소중의 명소이며, 특히 성곽의 보존상태나 원형유지가 아주 잘 돼있어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조들의 숨결과 우국충정의 얼이 깃들어 있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교육용으로나 혹은 관광자원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오늘 기자가 취재한 곳은 위의 유명한 곳이 아닌 금산 백령성이다.
이유는 금산군과 충청남도에서 현재 백령성지에 대해 국가지정 문화재 승격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에 있는 문화재가 국가지정으로 올라서면 국비 지원 등이 뒷받침돼 원형보전과 체계적인 보수정비가 가능하고, 그 위상도 높아져 의미가 더욱 남달라지기 때문이다.
 
백령성이 어떤 곳인지부터 살펴보자.
 
백령성 위치도. 지도상 금산군청 기준 왼쪽 대전방면에 있다.
▲ 백령성 위치도. 지도상 금산군청 기준 왼쪽 논산과 익산 방면에 있다.

백령성에 오르기 전 아랫부분에서 올려다 본 위치. 산 정상부 붉은표시 부분의 봉우리
▲ 백령성에 오르기 전 아랫부분에서 올려다 본 위치. 산 정상부 붉은표시 부분의 봉우리

백령성 이정표
▲ 백령성 이정표. 이곳에는 육백고지전승탑(6.25당시)도 있다.

백령성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 육백고지 전승탑.
▲ 백령성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 육백고지 전승탑.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와 역평리 선치산의 동쪽에 백암산(해발 759m) 정상에 있으며, 성지 전체 둘레가 약 2645m, 석축으로 쌓여진 성곽 둘레는 둘레가 약 200m에 이르는 백제의 테뫼식 산성(山城)이다.
서쪽 벽의 남은 상태를 보면 바깥쪽 벽의 높이는 5.8m~6.9m 이고 안쪽 벽은 2.3m~3m이며, 성벽의 너비는 4m에 이른 것으로 추정한다.
1834년(순조 34)에 김정호가 쓴 ‘청구도’에 ‘백자령(栢子嶺)’이라고 기록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후 1861년(철종 12)때 간행된 대동여지도에는 백자령 대신 ‘탄현(炭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말까지 신라의 영토였던 김천∼무주, 논산∼부여를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이며 금산군 제원면과 추부면을 통하여 영동 옥천에 이르는 험한 고갯길에 축조한 산성이기 때문에 백제의 요충지 구실을 하였다.
서기 660년(의자왕 20) 당시 나당연합군이 침공하자, 충신 흥수가 백마강과 탄현을 지킬 것을 의자왕에게 건의였으나 간신들에 의해 묵살되었고, 결국 그해 8월 사비성으로 향하던 신라군에 의해 함락된 곳이 이곳 탄현이다.
이곳은 현재 동쪽 부분(무주쪽)은 석축과 옹벽이 원형을 알 수 없게 무너져 적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지만 서쪽 부분(논산쪽)은 석축과 옹벽이 원형을 많이 유지하고 있음을 보아도 그 사실이 입증된다. 그리고 산성 내에는 백제기와편과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백제의 성임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 말기 축조돼 신라 방어와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으나 백제 멸망과 함께 폐기되고 잊혀졌다가 조선말께 알려진 듯 하다.
 
이같은 역사성과 문헌, 그리고 출토 유물 등에 의해 그 의미가 확인돼 백령성은 지난 1990년 5월 24일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었다.
 
백령성 안내 표지판
▲ 백령성 안내 표지판

테미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산성을 오르는 길. 성이 저만치 보인다.
▲ 테미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산성을 오르는 길. 성이 저만치 보인다.

초입에는 성지를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초입에는 성지를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앞서 백령성은 테뫼식이라고 했는데 성곽은 크게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나뉜다.
먼저 테뫼식의 경우 여기서 말하는 ‘테’는 테두리를 뜻하는 말이고 그 테를 뫼(山)에 두른다는 의미다.
즉 성곽을 쌓을 산 정상부 주변에 돌을 쌓을수 있도록 잘 다진 후 거기에 축조하는 방식이다. 봉우리들을 둘러쌓는 형식인데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7~8부 능선을 거의 수평으로 하여 둘러싼 것이며 산성 가운데 초기 소규모의 산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하면 산의 정상부에 성곽이 우뚝 서 외부에서 올라와 공성전을 펼칠 경우 성곽에서 수직으로 내려다 보며 올라오는 적을 제압하기 수월해지는 강점이 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성곽은 대부분 이렇게 테뫼식으로 축조되었다.

이와 다른 포곡식은 산의 정상부가 아닌 계곡이나 산 줄기를 따라 쌓은 성이다. 말 그대로 성곽안에 골짜기(谷)를 포함하여 축조한 것으로 성 내부는 물이 풍부하고 활동 공간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역시 가장 큰 장점은 외부 침입자에 의해 포위되고 고립됐을 경우 풍부한 물 덕분에 장기간 농성하며 버틸수 있다.
대개 테뫼식보다 규모가 크며 보다 후기의 것들이 여기에 포함되고 석성산성(부여), 행주산성, 옥천산성, 남한산성 등이 이 포곡식이다.
 
본격적인 백령성지 탐방
▲ 본격적인 백령성지 탐방. 해발 759m고지여서 저 아래는 나름 까마득하다.

산성에서 본 북쪽 방향. 만산홍엽이다.
▲ 산성에서 본 북쪽 방향. 만산홍엽이다.

산성에서 바라본 동쪽 금산방향.
▲ 산성에서 바라본 동쪽 금산방향. 맞은편 산세도 계곡이 상당히 깊고 크다. 능선을 따라 성곽의 축조 석벽이 오랜 세월을 견디고 쌓여있다.

성곽 중심부에서 본 남측 방향. 백제시대에 쌓은 성곽이지만 축조에 쓴 돌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성곽 중심부에서 본 남측 방향. 백제시대에 쌓은 성곽이지만 축조에 쓴 돌들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잡초더미 속에서 오랜 세월 견뎌낸 성곽의 모습.
▲ 잡초더미 속에서 오랜 세월 견뎌낸 성곽의 모습.

현재 백령성은 성곽의 잔존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성내 구조가 명확하다.
충남역사문화원에서는 지난 2004년 5월에 이 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시작해 상당수의 문화재를 찾아냈다. (이 부분은 다음번에 재 취재해서 기사를 올릴 계획)
백제시대 당시의 기와는 물론이고 남문지, 배수시설, 보도시설, 내부 석축, 저수용 목곽, 구들시설 등을 확인했다.
그중에서 특히 저수용 저수조는 대전시 월평동유적을 비롯해 백제계 산성에서 확인되는 중요 유적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충청남도와 금산군에서는 백령성이 국가문화재로 지정 승인될 경우 국비를 지원받아 성곽을 개보수 하고 시설물을 재정비 해서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출 계획이라 한다.
우선 남문과 북문 주변의 100m 성벽구간을 상징적으로 원형 복원한 뒤 잔여 구간은 더 이상의 붕괴를 막기 위해 현 상태로의 보존 처리를 할 계획이다.
남문의 경우 발굴에 의한 기초자료를 토대로 확인한 결과 폭 430cm, 길이 450cm의 현문식 성문인게 드러났기 때문에 이 원형 그대로 만들어 복원할 방침이다.
아울러 북문은 발굴 결과 개거식(開据式)으로 판명되었으므로 원형 복원한다. 개거식이란 성벽에 뚫어 놓은 상부가 열려 있는 성문을 말한다.
 
성곽을 취재하러 이른 아침에 올랐는데 이제 해가 저만치 떠올라 그 빛이 산악 전체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
▲ 성곽을 취재하러 이른 아침에 올랐는데 이제 해가 저만치 떠올라 그 빛이 산악 전체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

성곽 중심부. 여기에서 물을 가두었던 목곽이 발견됐다.
▲ 성곽 중심부에서 바라본 서북방향. 여기에서 물을 가두었던 목곽이 발견됐다.

문화재발굴 과정에서 목곽 등이 발견됐음을 알리는 표지판
▲ 문화재발굴 과정에서 목곽 등이 발견됐음을 알리는 표지판

발견된 목곽의 단면도.
▲ 발견된 목곽의 단면도.

목곽 출토 터.
▲ 성곽 정상부 중심의 목곽 출토 터. 가운데 약간 움푹 들어간 부분.

성곽 정상부 중심에서 남측으로 본 출입문
▲ 성곽 정상부 중심에서 남측으로 본 측벽. 저기 보이는 산은 바로 붙어있는게 아니라 수백미터 떨어진 맞은편 산자락이다.

성곽 중심에서 바라본 서북방향
▲ 성곽 중심에서 바라본 서북방향

성곽 정상부 중심을 기준으로 본 동남방향. 아래는 곧바로 깎아지른 낭떠러지다
▲ 성곽 정상부 중심을 기준으로 본 동남방향. 아래는 곧바로 깎아지른 낭떠러지다

성곽 남측 출입문 부분.
▲ 성곽 남측 출입문 부분.

성지를 복원 관리하기 위해 수목을 제거하고 정비중인 모습.
▲ 성지를 복원 관리하기 위해 수목을 제거하고 정비중인 모습.

마지막으로 목곽고와 망루, 그리고 건물지 내부의 유구 등도 정비할 계획이다.
저수용 목곽고의 경우 크기가 가로 480cm 세로 450cm 크기인데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성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외부를 감시 정찰했을 망루도 온전하게 만들어 주변지역을 조망하게 할 계획이다.
 
백령성에 대한 이같은 복원과 문화관광자원화 사업은 뭐니뭐니 해도 국가문화재 승인이 우선이다. 그것은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와 위상을 크게 높여주고, 특히 정부예산이 뒷받침 돼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수 있다.
따라서 충청남도와 금산군의 이같은 노력이 좋은 결실을 맺어 금산 백령성이 반드시 국가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이런 모든 노력이 잘 진행돼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백령성에 올라 선조들의 숨결을 이해하고 나라사랑의 새로운 마음을 다지는데 일조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로 충청남도에서는 이번 백령성 뿐만 아니라 보령 성주사지 동삼층석탑, 논산 개태사지, 금산 태조대왕태실도 함께 국가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다고 한다.
아울러 아산 온양민속박물관소장 금고, 예산 남연군의 묘 및 가야사지, 부여 무량사오층석탑 출토 유물, 공주 갑사 대웅전, 서산 문수사 극락보전, 부여 무량사 극락전 후불탱, 청양 도림사지삼층석탑 등 10건에 대해서도 향후 그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 정밀 실측과 조사를 진행중이며 그 결과에 따라 이 문화재들도 국가지정 승격을 신청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2004년도에 발굴 조사를 시작한 후 찾아낸 백령성의 유물은 현재 국가로 귀속되어 이전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전 승인이 끝나면 국립중앙박물관 혹은 금산이나 충청남도내 다른 박물관 어디에라도 전시할 계획이라 한다.
도민리포터는 현재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잘 모르는 모든분들을 위해 다음 포스팅때 이 유물들의 종류와 사진, 의미, 특징 등을 별도로 취재해서 올릴 계획이다.


다시한번 백령성이 반드시 국가문화재로 지정을 받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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