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전투와 송장배미에 서린 풀뿌리 민주주의의 태동을 느끼다.
▲공주경찰서 교차로 근처에 위치한 '용못(공주시 웅진동247)' ; 역사적 사실은 '공주학연구원'의 자료와 '용못' 안내판의 내용을 참고로 한다.
'우금치(=우금티)전투'는 반봉건·반외세를 부르짖은 '동학농민운동'의 최후의 전투였다. 충청감영이 위치한 공주는 전라도에서 올라온 농민군이 서울로 진군하기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했던 중부의 거점지였다.
농민군은 정부의 방어책이 엄밀했고 배후를 공격당할 위험 속에서 신식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200여명과 관군 2500여명의 연합토벌군과 1894년 11월8일 우금치(우금티)에서 40~50여차례나 혈전을 벌이나 결국 전멸당한다.
용못에서의 전투는 11월 9일 농민군이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용못'은 금강물이 말라도 절대 마르지 않았다는 깊은 연못이었다고 하는데, 밀려난 농민군들이 쫓기다 이 연못에 빠져 전사했고, 그 후로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쌓인 논(=논배미)이라는 의미로 '송장배미'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 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에서 세운 추모비
8월에 찾은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4호 '용못(송장배미)'에는 뒤늦게 꽃봉오리를 틔우려는 연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전적지임을 알리는 '송장배미' 추모비 주변은 잡풀이 우거져 연꽃군락지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씁쓸함을 자아냈다. 다행히 9월에 다시 찾았을 때에는 누군가에 의해 유적지 주변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용못(=송장배미)' 유적지에 세워진 동학농민전쟁 추모 조형물
▲ '송장배미' 추모비 뒷면
1973년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지고, 1994년 3월 17일 '우금치전적지' 일대가 사적 제387호로 등록되었다.
공주시에서는 매년 12월에 개최되는 '우금티 추모예술제'에서 2000년 이후부터 '송장배미' 추모제례를 예술제의 고정 행사로 추가하였고, 동학농민운동 전적지인 '용못'에는 조형물을 세우게 되었다. 뜻있는 분들은 '송장배미' 또한 성역화 할 필요가 있음을 한 목소리 내어 높이고 있다.
'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가장 약한 자들의 가장 강한 의지를 천명한 사건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전적지인 '송장배미'를 지나쳐 갈 때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희생된 고결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건전한 역사의식을 함양하는 기회로 삼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