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어! 누가 누가 더 착하지?

공주 효심공원-향덕과 이복의 효행비와 비각의 의미를 탐미하다

2017.07.31(월) 11:25:12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유교 문화권인 한국,중국,일본 동북아시아 3국을 비교하면서 호사가들은 중국은 '충(忠)'의 나라요, 일본은'의(義)'의 나라요,한국은'효(孝)'의 나라라 일컫는다.그 만큼 대한민국 땅이라면  어느 지역에  가든 유교 덕목 중 '효'를 중시하는 효행 전설이나 지명, 명소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효심공원 안내도(아래)와 상징조형물(위)
▲ 효심공원 안내도(아래)와 상징조형물이 보이는 전경(위)  

 2016년 11월15일 충남역사박물관과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조성된 효심공원(공주시 국고개길28-10)의  준공식이 있었다.
효심공원 안내도에 따르면 소중한 문화 유산인 '효'의 가치와 의미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공주지역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향덕'과  ' 이복'의 이야기를 주제로 조성되어졌다고 한다.

삼국사기 문헌에 최초로 기록된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향덕'과 국고개 전설의 주인공인 효자 '이복'의 효행을 기리는 효행비는 가장 윗단에 설치하였고,'효'와 관련된 부조와 '효열문,효원탑,효행상,행복가족상'등 상징 조형물 4점이 ①~④까지 각 번호대로 위치하고 있다.

효자 향덕비
▲ 효자 향덕비(전설-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자료 참조)

향덕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공주 판적향(지금의 공주시 소학동)사람이었다. 경덕왕14년(755년)봄에 기근이 심각하고 전염병이 돌아 향덕의 부모도 굶주리다  병이 들게 되었고,어머니는 악창까지 나고 말았다.향덕은 입으로 어머니의 고름을 빨아내고 정성을 다하였지만 먹을 것이 없어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게 되었다.고민 끝에 향덕은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고, 기력을 찾자 어머니의 병은 낫게 되었다.
또, 향덕은 자신의 허벅지가 채 낫기도 전에 어머니께 드릴 잉어를 잡기 위해 냇물에 들어갔는데 이 때  향덕의 핏물로 냇물은 붉게 흘렀고,이런 연유로 향덕이 고기를 잡던 내를 혈흔천(血痕川)이라고 부르게 되어 오늘날까지 같은 이름으로 명명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왕에게 보고되어 경덕왕은 벼300곡과 집 1채,그리고 토지를 향덕에게 하사하였다. 또한 비석을 세워 향덕의 효행을 널리 알리게 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공주시 소학동(76-7번지)에 있는 향덕의 효자비인 것이다. 경덕왕 때 세워진 비석은 남아 있지 않고 후대에 중건되어 비석 2기가 남아 있고, 효심공원에 있는 비석은 모사본으로 제작하였다 .'효자 향덕비'는 1982년12월31일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다.

효자 '이복'정려비각 과 구비舊碑)와 신비(新碑)
▲ 효자 '이복'정려비각과 구비(舊碑-우측 맨 아래)와 신비(新碑-우측 가운데);전설-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자료 참조

이복은 고려 시대 향리의 신분으로 눈 먼 홀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를 위해 추운 겨울날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남의 집 일을 해주고 얻어 온 고깃국이 식을까 가슴에 품고 오다가  실수로  국을 엎어 통곡하여 울었다. 그 후 사람들은 효자가 국을 엎지른 고개라 하여 '국고개'라 불렀고, 고갯마루의 마을을 국이 엎어진 동네라 하여 '갱경골(羹傾谷)'이라 하였다. 갱경골은 현재 공주 중동성당, 충남역사박물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고려말엽에 세워진 '이복'의 효행비는 옥룡동 비선거리(현 충남역사박물관 아래 마을)에 버려져 있었는데, 1978년 공주시 옥룡동 노인회를 중심으로 옥룡동 주민센터의 서남쪽으로 옮겼다가 2016년 공주 효심공원으로 다시 옮긴 것이다. '효자 이복비'는 2009년2월16일 공주향토문화유적 제34호로 지정되었다.

효심공원 상징 조형물(효원탑,효행像,행복가족像)
▲ 효심공원 상징 조형물(효원탑,효행像,행복가족像)

전통 농업사회가 붕괴되고 산업화,공업화사회로 빠르게 바뀌면서  우리  민족의  '효'정신은 뒷전으로 밀려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3대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만인의 모범이 되어지는 시대다.편리함과 풍요로움 속에서도 우선할 중요한 것들은 반드시 기억하고 대대손손 전해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충남역사박물관 입구의 효 상징물(좌)과 국고개 문화거리(우)
▲ 충남역사박물관 입구의 효 상징물(좌)과 국고개 문화거리(우) 
 
공주시는 매년 4월 충남역사박물관과 국고개 일대에서 '국고개 역사문화축제'를 개최한다. 3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서 장관을 이루는 벚꽃구경과 함께 그림대회를 열고 목판에 효자이야기를 찍어 보기도 하며 전통 문화를 체험한다.
공주시의 거리와 골목 곳곳에는 선한 이야기와 듬쑥한 가르침이 깃들어 있어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이정표가 되어 주고 있다.
 
  

 

엥선생 깡언니님의 다른 기사 보기

[엥선생 깡언니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