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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공주 공산성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고마운 바람~

2017.08.24(목) 07:43:50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주 공산성 관광안내소
▲ 공주 공산성 관광안내소 : (충남 공주시 금성동 66-4/041-856-7700)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 모바일이나 인터넷으로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미리 확인하고 계획을 세워 떠나겠지만, 여행지에 도착해서  관광안내소를  방문하여 안내책자와 팜플렛, 리플렛 등을  챙긴 후 여정을 이어가는 편이 여러모로 득이 많은 것 같다.

[여름! 공산성 완주를 위한 준비물]
1. 꽝꽝 얼린 생수 500ml  2통 이상과 수건
2. 벌레 퇴치를 할 수 있는 약품류
3. 보조베터리 (멋진 풍광이 너무 많습니다)
4. 이어폰을 준비하고, QR Code Reader 앱을 미리 깔아 놓는다.

공산성 관광안내소 앞에 집합한 송인덕 문화관광해설사와 웅진포럼 회원들▲ 공산성(이용시간 : 09:00 ~ 18:00 설날 및 추석당일 휴무 )  관광안내소 앞에 집합한 송인덕 문화관광해설사와 웅진포럼 회원들

5월부터 8월초까지 4차례에 걸쳐 공산성을 방문했다. 4번의 방문 중 공산성을 완주한 지난 7월 29일(토) 오전 10시30분  공주 '공산성' 관광안내소 앞에는 눈에 띄는 일행들이 보였다. 공주시에는  인지도 높은  문화관광해설사가 몇 분 계신데, 이날 그 중 한 분인 '송인덕'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뵐 수 있었다.

YD 수학공식의 창안자이기도 한 '송인덕' 문화관광해설사와 '웅진포럼(회장 : 염관택)' 회원들이 제1차 공주시 문화재 답사를 위해 공산성 주차장에 집합해 있었다. '웅진포럼'은 공주시의 소중한 문화재를  널리 알리고  길이 보존하기  위해 뜻을 모은 시민들의 모임으로 2016년 8월 발기했다.

오전에는 웅진포럼 회원들과  함께 송인덕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① 금서루 입구 비석군→ ② 금서루→ ③ 쌍수정→ ④ 진남루→ ⑤ 영동루→ ⑥ 임류각→ ⑦ 명국삼장비→ ⑧ 광복루→ ⑨ 영은사→ ⑩ 만하루와 연지→ ⑪ 성안마을→ ⑫ 공북루→ ⑬ 공산정→ ⑭ 금서루의  완주 코스 중①~④까지  일부 코스를 함께 돌아보았다.
 
도시재생 청년창업 푸드트럭1호점
▲ 도시재생 청년창업 푸드트럭1호점

관광안내소와  매표소 사이의 주차장 한편에는  공주시 도시재생 청년창업  푸드트럭 1호점 [휴: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 푸드트럭의 사장님은 착한 옆집 오빠 같아  보이는 오경택 대표이다. 2017년 3월부터 공산성 주차장에서 푸드트럭을 운영하여 간단한 먹거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알밤스테이크, 알밤닭강정, 철판닭꼬치 등을 판매하고 있다. 7월 말에는  메뉴판을 새로 단장하여 푸드트럭이 한결  말끔해 보였다.

공주공산성과그곳에서만난사람들 1
▲ 공산성 맞은 편 무령왕릉 가는 길 입구에 세워진 공산성 안내석

2015년 7월 4일,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공주, 부여, 익산지역의 '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공주는 '송산리 고분군'과 '공산성' 2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공주공산성과그곳에서만난사람들 2
▲ 공산성 맞은편에서 본 매표소 주변과 금서루 전경:이하 공산성에 관한 설명은 공주시 홈페이지 및 팜플렛을 자료로 삼는다.  

사적 제 12호인 공주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475~538)를 지킨 왕성이다. 해발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지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렸다. 조선 선조·인조 때 지금과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다.

성벽은 밖에서 오르지 못하게 쌓고(치성雉城), 남북에 두 개의 문루와 적에게 보이지 않는 출입문(암문暗門)을 만들었다. 공산성 옆의 공주 옥녀봉성(충청남도 기념물 제 99호)은 흙으로 쌓은 성(퇴뫼식)으로 공산성의 보조왕성의 역할을 하였다.
백제문화제(2017.9.28~10.5) 기간에는 공산성 앞에서 금강신관공원까지 부교로 건널 수 있다. 금서루에서는 4월~10월 토, 일요일 11시~17시(※혹서기인 6월~8월은 쉽니다!)에  ‘웅진성수문병근무교대식’을 볼 수 있고, 금강신관공원에서는 야경이 눈부신 신비의 성 '공산성'을  재발견 할 수 있다.

공주공산성과그곳에서만난사람들 3▲ 금서루와  입구 풍경

매표소를 지나 금서루에 오르기까지 '공산성'이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임을 알리는 안내석과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에 대한 대형 안내판이 먼저 보이지만 가장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길게 늘어선 비석군일 것이다.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공덕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들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1817년(순조17년) 대홍수로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다리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명의 일반백성을 기록한 '제민천교 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공산성내의 안내판
▲ 공산성내의 안내판  

글 서두에 공산성 완주에 필요한 준비물을 안내해 두었는데, 그 중 네 번째에 이어폰과 QR Code Reader 앱을 미리 깔아놓을 것을 당부한 까닭은 공산성내의 안내판이 세 종류로 나눠지기 때문이다. 좌우상단에 보이는 안내판은 QR Code Reader 로 읽으면 자세한 설명을 음성가이드로 들을 수 있는 것들이다. 아이들이나 연세 많으신 분, 외국인을 동행하는 경우 꼭 이용해 보길 권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도 동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선명한 사진까지 제공되기 때문에 '광복루'에서 큰 도움을 받은 1인이다.
 
공주공산성과그곳에서만난사람들 4
▲ 금서루에서

공산성 깃발 이야기
▲ 공산성 깃발이야기
 
5월 말 라일락, 아카시아 만큼이나 매혹적인 향기로 방문객을 반기던 쥐똥나무 울타리의 하얀꽃들은 내년을 또 기약하며  열매맺기에 한창 분주했다. 그 울타리 끝에 '금서루'가 있다!
'금서루'는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등의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자료 및 지형적 여건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새롭게 복원된 '금서루'는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송인덕 문화해설사는 '금서루'에서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공산성의 깃발이야기, 가야멸망에서 백제멸망까지, 고구마 수입과정과 공주시 무릉동에 얽힌 이야기,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서고청(자연동)굴' 에 얽힌 설화 등  공주시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금서루를 둘러보고 나면 남쪽 문루인 '진남루를 먼저 볼 것이냐, 북쪽 문루인 '공북루' 쪽으로 갈 것이냐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우리 일행은  '진남루' 쪽을 선택했다. 송인덕 문화해설사의 눈이 향한 사진은 '공북루'로 가는 길이고, 발끝이 향한 사진은 '진남루'로 향하는 길이다.
공산성에 올 때마다 보게 되는 하늘색 티셔츠의 '천지화랑' 회원들이 인솔교사와 함께 금서루쪽으로 내려온다. '공북루' 파였던가 보다^^

이동하는 중간에 '송인덕' 문화해설사는 공주시가지를 바라보며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인 '황새바위', '송산리 고분군', 제사유적지인 '정지산유적', 공주의 옛 이름인 '고마'의 유래처인 '고마나루'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덧붙여 나가셨다. 기회가 닿으면 송인덕 문화해설사가 귀에 '콕콕' 박히도록 재미있게 설명해 주신 곳들을 둘러볼 생각이다.

올라가는 길에 연무도서관(논산시) '길 위의 인문학' 팀과 길을 조금씩 터주며 비켜 지나가게 되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논산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저희는 공주시민이에요."
"공주시민인데 뭐하러 공산성에 오셨어요?"
"공주시민이니까 더 잘 알아야 해서요." 웅진포럼 회원들은 현답을 내놓는다.
 
공주공산성과그곳에서만난사람들 5
▲ 쌍수정에서 본 추정 백제왕궁지 전경 

추정 백제왕궁지의 연지
▲ 추정 백제왕궁지의 연지
 
쌍수정 앞마당에서 와당과 목곽고(저장고)가 발굴되면서 백제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475년 한성에서 공주로 천도할 때의 상황으로 보아 왕궁을 크게 지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산에 왕궁을 짓다 보니 식량과 용수의 조달 또한 용이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3000명이 먹어도 될 만큼의 큰 저장고와 연지는 이러한 연유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제는 아름드리 고목들만이 모진 긴 세월을 견뎌내고 백제왕궁 추정지를 지켜내고 있었다.
 
지난 5월과 6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웅진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공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우리춤 공연, 풍물공연, 오카리나 연주, 노래교실 운영 등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생수를 제공하여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쌍수정과 쌍수정 사적비
▲ 쌍수정과 쌍수정 사적비

'쌍수정'은 이괄의 난(1624)으로 피신한 인조가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1734)누각이다. 인조는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에 벼슬을 내리고자 하였는데,충청북도 보은군에 이미 정2품 벼슬을 받은 소나무가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그 보다는 한 단계 낮은 정3품 '통훈대부'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영조10년(1734년)쌍수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이러한 기록은 '쌍수정 사적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송인덕' 해설사가 쌍수정과 관련지어 '웅진포럼' 회원들에게 냈던 퀴즈이다.
"백제문화제(2017.9.28~10.5) 기간에는 공주시장과 공주시민이 함께 인절미를 만드는데 그 길이는 얼마일까요?"
"정답은... 475m입니다."
그 까닭은 제22대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한 해가 475년이기 때문이랍니다.
인조가 피난 중에 우성면 목천리 근처 임씨 댁에서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하였는데, 왕이 연거푸 몇 개를 먹더니. 떡의 이름을 하문하였다고 한다. 이 때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임씨가 진상한 절미(絶味)라 하여 임절미(任絶味)라고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고, 공주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공주떡'이 되었다.

진남루와 남문길 전경
▲ 진남루와 남문길 전경


'웅진포럼'회원들과 헤어진 오후에는  다른 일행과 '진남루'부터  돌아보게 되었다. 땡볕에 갇혀 이동해야 하는 시간대여서 고행길이 빤히 예견되었다. 글 앞머리의 준비물 2번이 가장 필요했던 코스이다.

'진남루'는 조선 초기, 공산성이 토성에서 석성으로 개축되던 시기에 세워진  공산성의 남문이며 공주 시내에서 공산성으로 출입하는 정문이다. 진남루와 영명사의 갈래길에  김구선생, '자전거왕' 엄복동, 1968년 개봉한 영화 '공산성의 혈투'와 공산성에 얽힌 뒷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진남루'는 조선시대에는 삼남(전라, 경상, 충청)대로 9개 가운데 제 7로에 해당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진남루로 오르는 계단에 보이는  실물 크기의  '말과 마부상'은  전라도와 충청도 선비들이 과거급제의 꿈을 꾸며 공주를 통과해 한양으로 가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이었다. 

공주 공산성 영동루
▲ 공주 공산성 영동루

'영동루'는 공산성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 일부분의 구조를 확인하였고, 그 발굴자료와1859년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기록(2층3칸)을 근거로 1993년 동문의 누각을 복원한 것이다.

문루의 명칭은 2009년 공주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영동루' 라고 짓게 되었다

공주 공산성 임류각
▲ 공주 공산성 임류각
 
 백제 제 24대 동성왕 22년(500년)에 지어진 누각으로 신하들과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흐르는 금강물을 내려본다'는 뜻으로 임류각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팜플렛 안내도 상으로는 꽤 멀어 보이는 '명국삼장비'는 '임류각'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중국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는데 당시 '제독 이공', '위관 임제', '유격장 남방위'라는 세 명의 명나라 장수가 공주에 머물며 군대를 지휘했고 전쟁이 끝난 후 공주 사람들이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1599년 세운 비(碑)라고 한다.

'쌍수정' 근처 수도시설에서 잠시 목을 축였지만, 비 오듯 쏟아낸 땀 때문인지 갈증이 계속되었다.  가져간 얼음물도 동이 나 '명국삼장비'를 둘러보고 나서 인근 수도시설에서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잘 차려입은  양복에 구둣발로 공산성 산책길에 오르신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신  벤치 옆에 잠시 앉았다. 가뿐숨을 고르고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참 맞으며 쉬고 있으니 '무아지경'에 빠져든 것만 같았다.

공주공산성과그곳에서만난사람들 6 ▲ 공산성 광복루(QR Code Reader 로 읽은 광복루 모습)

원기를 회복하고 드디어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광복루'에 다다랐다.
'광복루'는 원래 '해상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웅심각(雄心閣)' 으로 바꿔 부르던 것을 1946년 4월에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 나라를 다시 찾았음을 기리고자 '광복루'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고 한다.

'광복루'의 사진은 앞서 언급한대로 QR Code Reader 앱을 이용하여 정보와 사진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이유는 윗옷까지 벗어젖히고 '광복루' 누각 아래 그늘에서 쉬고 계시는 몇몇 몰지각한 분들 때문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이동할 기미가 안 보여 현장사진 찍기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세계문화유산인 '공주 공산성'을 보다 가치있는 문화재로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동문선' 을 지은 '서거정'은 공산성과 금강의 빼어난 운치를 '공주10경'이란 시를 지어 표현하였다고 한다.지금은 맞은편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음에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빼어난 경치에 넋을 놓고 말았다.

"아! 시원해.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해!" 시원해 시원해를 연발하며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던 두 여자관광객의 표현처럼 내 몸이 느끼는 최적의 시원한 바람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사용하고만 싶었다.

공산성의 동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길은 험준했다. 깎아지른  성곽길은 안전펜스가 없어 자칫 헛발이라도 디디면 바로 절벽으로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그 길 위에 3~4살로 보이는 꼬마가 앞서 내려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번쩍 들어서 안고 내려가면 될텐데... 생각해 보니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 아, 상상조차 하기 싫다! 꽉 잡은 손과 조심조심 내딛는 발걸음을 챙기는 부모님은 뒤따르던 우리에게  "괜찮습니다. 먼저 가세요~"  길을 양보한다.
 
영은사 전경과 주변 풍경
▲ 영은사 전경과 주변 풍경

체감기울기 60~70도의 난코스를 지나오니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곳이겠구나! 싶은 '영은사'가 나타났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약숫물이 반가워 한 바가지 들이키고,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위엄을 보이며 서 있는 입구로 향했다.

조선시대 창건(1458년)한 '영은사'는 임진왜란 당시 영규대사가 승병을 조직, 합숙 훈련하여 금산 전투에 참여하는 등 호국사찰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절이다. 매번 왜적이 침입하면 산신령이 도와 번번이 물리친 전설이 있어 영은사(靈隱寺)라 불리었다 한다.
사역(寺域)은  원통전과 관일루, 요사채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재자료 제 51호 목조관음보살좌상(유형문화재 제160호)이 모셔져 있으며, 청동범종(유형문화재 제 161호), 아미타후불탱화(문화재자료 제 376호),칠성탱화(문화재 자료 제377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서예가 일강 '전병택' 선생의 독특한 서체로 쓰여진 '원통전' 현판은 낙관이 찍혀 있어 다소 생소하게 다가왔다.

만하루와 연지
▲ 만하루와 연지

1754년(영조30)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연지'는 금강의 물을 가둬 성 안의 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시설로 만들어졌다. 연못이 무너지지 않도록 석축을 단이 지게 쌓으며 돌과 돌 사이사이는 황토로 메웠다. 그리고 연지 위 든든한 제방 위에 세워진 '만하루'는 1982년 발굴 조사로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1984년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건물을 복원하였다.

공북루와 오며 가며 보이는 풍경▲ 공북루와 오며 가며 보이는 풍경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에 가는 통로에 조선시대 '석빙고'가 있어 일순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얼음이 귀했던 시절 한여름에 공산성 완주 코스를 도는 우리 일행처럼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약재를 보관하거나 얼음을 저장하기도 하다가 누에의 알을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하는 잠종저온창고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공북루'는 누각을 통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누각 안의 사방에 붙어 있는 한문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둘러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본다고 알아?" 속마음을 헤아린 힐문을 던지자 같이 둘러보던 멋쟁이 아가씨가 빙그레 미소짓더니 먼저 자리를 뜬다.

공산성 '공북루' 앞에 있던 성안마을은 서울로 올라가는 관리들의 주된 통로였다고 한다. 공산성과 군영의 기능을 상실한 뒤 마을이 생겼고 이 마을의 토지는 공주갑부 '김갑순' 이라는 사람이 사서 쌀창고를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시장이 열리고 쌀창고에서 시내로 쌀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길이 '서문고개' 였다고 한다.

공산정과 금강교
▲ 공산정과 금강교

공산성 서북쪽 산마루에 있는 누각 '공산정'은 금강과 금강교 등 공주의 전경을 한 눈에 전망할 수 있다. 나룻배 20~30척을 잇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든 다리, 일명 '배다리'를 놓아 늘어난 사람과 물자를 이동시키다가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는 댓가로 금강에 다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공주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된 '금강(철)교'이다. 

공주시는 금강을 활용한 관광자원(뱃길 조성, 금강수변 종합개발) 육성 및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제2금강교 설계'를 시작했다. '제2금강교'가 완공되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의 접근성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예상되고, 공주시에는 새로운 고마운 바람이 불어 지역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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