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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김옥균 묘로 알아보는 갑신정변 이야기

2017.07.04(화) 18:18:49 | dreamyoung (이메일주소:kge0227@nate.com
               	kge0227@nate.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옥균묘로알아보는갑신정변이야기 1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
그의 생가지는 충청남도 공주에 있으며 이곳은 그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영인산 자연휴양림 가까이에 김옥균 묘가 있는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에 들러보았다.

김옥균묘로알아보는갑신정변이야기 2
"3일 천하"의 불명예를 안고 개혁에 실패한 김옥균은 역사 책에서 많이 보던 인물 중의 한 명일 것이다.
시기가 이른 급진 개혁으로 인해 어쩌면 실패가 빤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계획을 감행하다 결국 정변으로 마감하고 각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 이야기이다.

1884년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청에 대한 사대 외교 관계를 청산하고 입헌 군주제로의 변화, 문벌을 타파하고 인민 평등권을 주장하며 근대화 운동의 벌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의존적인 태도로 하여금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 그 이후에는 청의 반발로 인해 내정 간섭이 더 심해졌으며,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경제적 침략에 더 주력하게 됨으로써 조선 농민들의 고통만 더 가중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남하를 시도하였으며 이를 견해하려는 영국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거문도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갑신정변의 실패를 발단으로 동서양 국가들의 각축전이 조선 땅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하기에 급진적인 개혁을 이루려다 실패한 갑신정변의 주도자들과 그들의 일가친척까지도 모두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구한말 조선시대에서는 어쩜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싸늘한 평가에 실제 이곳 김옥균 묘역을 찾아보니 석등, 석양, 비 등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김옥균묘로알아보는갑신정변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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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잠시 잡았으나 청나라 군사 1500명의 무력 진압으로 결국 일본으로 망명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와 친한 일본인이 효시된 머리를 도쿄의 외인 묘지에 묻고 비를 세웠는데, 1914년 이곳으로 이장, 정경부인 유 씨와 합장한 것이 지금의 묘지이다.
 
김옥균묘로알아보는갑신정변이야기 5

그럼 "왜 김옥균은 그의 생가가 있는 공주에 묻히지 않고 아산에 안장된 것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아산 군수였던 일본인의 아들에 의해서 이곳 영인면으로 이장되어 지금까지 이른다고 한다.

김옥균묘로알아보는갑신정변이야기 6

비록 친일에 가까운 개혁 운동으로 후대의 평가는 냉정하나 혼돈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애쓴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도 찾지 않는 아산리 그의 묘소에는 들꽃만이 듬성듬성 피어 그의 넋을 달래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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