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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관북리유적 내의 부여현관아

객사, 동헌, 도강영당

2017.04.20(목) 21:25:06 | 설화 (이메일주소:ullallas2@naver.com
               	ullallas2@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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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봄날,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계절이 돌아왔는데요. 사비 백제의 마지막 도성이 있던 옛 왕궁지로 추정되는 관북리유적을 찾았습니다.

부소산을 오르는 길목에서 만날 수 있는 관북리유적은 옛 사비의 왕궁을 건설하기 위해서 형성된 곳으로 대형 전각건물지와 기와로 기단을 꾸민 건물터, 남북·동서방향의 도로 등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그 밖에도 배수로, 목곽수조, 연지, 우물터 등과 함께 철기, 금, 금동제품 등을 제작하던 공방시설등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이 곳이 사비 백제의 옛 왕궁터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확실한 단서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외에도 이 곳에는 부여현관아가 위치해 있어 동헌, 객사, 도강영당 등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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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현관아 중 한곳인 객사는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둔 관사로 예로부터 지방의 공공건물 중에 가장 높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나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며 임금에 대한 예를 행하는 장소로 여겼다고 하는데요. 수령들은 그 고을에 새로 부임을 하게 되면 먼저 객사에 들려 배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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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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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당의 양 옆으로 배치된 익사

또 객사는 외국사신들이나 중앙에서 온 관리들이 공무를 위해 파견되었을 때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공간인데요. 객사 건물은 주로 한일 자(ㅡ)형으로 지어 중앙에 정당을 배치해 전패나 궐패를 모시고 양 옆으로는 익사로 구성해 숙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또 익사보다 정당의 지붕을 한 단 더 높이 건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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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동헌

객사에서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부여 동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곳 역시 조선시대 부여현의 행정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진 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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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동헌은 정면에서 바라볼 때 5칸, 측면으로는 2칸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에 민도리집으로 되어 있는데요. 객사, 향교와 함께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주요 건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거나 소실되어 현존하는 것이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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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강영당

동헌 다음으로 찾은 곳은 도강영당입니다. 이 곳은 조선 말 부여현의 내아건물로 해방 후 귀속재산인 가옥을 수리했다고 하는데요. 홍가신, 허목, 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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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나 학자로 명종 2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고 합니다. 또 선조 37년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다고 하는데요.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에 뛰어났으며 후에는 형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허목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상적으로 이황과 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벼슬이 이르름은 물론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채제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35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정승으로 영조의 세자폐위 문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는데 이로인해 영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으로 행정의 최고 책임을 맡기도 하였는데요. 조선의 중흥을 모색한 마지막 개혁의 시대를 보필하고 주도함으로써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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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나 서원 등의 옛 문화재들을 돌아보다보면 문이 잠겨 있어서 내부를 볼 수 없거나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는 곳들이 종종 있는데 부여현관아인 객사와 동헌, 도강영당은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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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렇게 개방이 되어 있어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어 있어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이 부여의 소중한 문화재인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등을 돌아보고 백제의 역사에 대해 더욱 알아가는 계기가 되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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