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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삼일절을 앞두고 만난 윤봉길 의사의 발자취

2017.02.28(화) 23:37:59 | 길자(吉子) (이메일주소:azafarm@naver.com
               	azafarm@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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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맞아 매헌 윤봉길 의사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 그리고 윤의사가 태어나고 자라난 생가 이 두 군데를 찾았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 출생으로 1932년 4월 29일, 상해에서 열린 일본의 천장절 겸 전승 축하 기념식에서 수류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입니다. 광복 이후인 1968년에 윤의사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충의사가 그의 고향 덕산면 시량리에 세워졌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넋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곳, 함께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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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농촌운동을 벌였던 곳 일대는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해 드린 충의사를 비롯하여 사적비, 어록탑, 의거기념탑, 유허비, 기념관을 비롯하여 윤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 도중도 내 저한당과 광헌당 그리고 농촌운동을 펼친 부흥원 등이 사적에 포함되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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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앞두고 참배객들이 윤봉길 의사 유적을 찾는 모습을 여럿 볼 수 있었습니다. 충의사는 일반적인 사당과는 달리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고 전체적으로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왠지모를 고고함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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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안쪽에는 윤봉길 의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언제 그려진 영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단청으로 장식된 실내 그리고 닫집아래 모셔진 현대적인 영정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듯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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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앞에는 방명록이 하나 놓여져 있었는데요 호기심이 발동하여 펴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충의사를 방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는데요 서울을 비롯해 대전, 마산 충주 등 충남지역 외에도 전국적으로 많은 분들이 윤봉길 의사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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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를 내려와 오른편에는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과의 고장 예산 답게 사과 캐릭터가 기념관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과연 어떤 전시물이 있을지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요 이게 왠걸 전시관 내부 정리로 인하여 관람이 불가하다는 안내문이 입구에 붙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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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맞이하여 많은 분들이 윤봉길 의사 유적을 찾고 있는 상황에서 하필이면 이 시점에 내부 정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공공기관에서는 일반적으로 휴관일에 이런 정리를 하는거로 알고 있는데 멀리서 찾은 참배객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작업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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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데로 주변 기념물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기념관 옆에는 윤봉길의사의 말씀을 적어놓은 어록탑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윤봉길의사하면 폭탄을 투척해 일제의 앞잡이들을 처단한 의사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의거 외에도 고향에서 야학당을 열어 문맹퇴치 운동을 펼치는 것과 함께 저축운동, 토산품 애용운동을 펼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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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그의 사상을 어록을 통해 느낄 수 있었는데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역시 절실하게 필요한 사상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촌이 잘 살고 농민들의 땀이 인정받는 세상 바로 청년 윤봉길이 꿈꾸던 세상이었을 텐데요 이와 유사한 활동이 충남에서 '3농혁신'이란 이름으로 펼쳐지고 있고 앞으로 어떤 변화의 물결을 일으킬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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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서 2차선 도로를 건너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게 되면 '도중도'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나옵니다. '조선반도 속의 섬'이란 뜻을 가진 도중도는 일본인이 절대 침입 못한다는 뜻으로 윤봉길 의사께서 직접 명명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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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도 안쪽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 막 뛰어다니기 시작한 아들녀석과 같이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날이 조금 더 풀리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이곳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다짐을 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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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의 초가집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4세까지 지내던 광헌당 입니다.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윤의사께서 이곳에서 태어나 제가 보고있던 주변의 모습 속에서 자랐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과연 그의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어졌을까 그리고 그러한 대담함과 조국애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는 생각에 잠길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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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이곳은 윤의사께서 야학당을 열어 농촌계몽활동을 펼치던 곳이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계몽이 절대적이라는 그의 철학 그리고 농촌이 그 뿌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 젊은 나이인 23세까지 이곳에서 애국계몽활동을 펼쳤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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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와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열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소중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우해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하는 고민을 해봅니다.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사회, 법 질서가 지켜지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꿔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의 아들과 딸이 꿈을 이루며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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