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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일가(一家) 6명이 항일 호국훈장 받은 김한종 의사 가문

국가보훈처 공훈기록 통해 확인한 김한종 의사 가문의 놀라운 호국 역사

2017.01.17(화) 23:57:47 | 유병양 (이메일주소:dbquddid88@hanmail.net
               	dbquddid8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도민리포터는 아주 중요한 사실,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있는 소중한 호국사(護國史) 한가지를 포스팅하고자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과 우리 가족, 그리고 나를 있게 해준 내나라 내 국가 내 민족. 특히 요즘 위안부 소녀상 문제로 일본의 불쾌하기 짝이 없는 주한 일본대사 본국 소환조치 등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끼면서 나라 없는 설움이 어떤건지 다시금 절절하게 느낀다.
 
그리고 특히 국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자기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버리고 나섰던 위대한 선각자들, 우린 과연 그들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걸까.
 
충남은 다른 어느지역보다 충신과 의기 넘치는 선각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예산에는 윤봉길 의사부터 수당 이남규선생, 김한종 의사까지.

오늘 포스팅하고자 하는 인물은 김한종 의사인데 그 전에 이남규선생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이남규 선생이 위대한 이유중 하나는 일가(一家)중 4명이 호국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항일의 기치를 높게 들었던 이남규 선생 당신은 물론이고, 일제로부터 아버지를 지키려다 함께 순국한 큰아들 이충구 선생(2代), 연해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동녕, 이회영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광복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던 이충구 선생의 아들 이승복 선생(3代), 그리고 마지막으로 6.25전쟁중 최전선에서 교전중 전사한 이승복 선생의 아들 이장원 선생(4代)까지 일가 4명이 호국관련 훈장을 받은 명문가중 명문가다.
 
그런데...
 
오늘 포스팅하고자 하는 김한종 의사는 어찌보면 이남규 선생의 4대 호국보다 더 강렬하고 위대한 그것인지 모른다. 물론 호국의 크기를 나눠서 더하다, 덜하다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을 충남넷을 통해 알려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일가6명이항일호국훈장받은김한종의사가문 1

김한종 의사 생가의 '부명헌'
▲ 김한종 의사 생가의 '부명헌'

일가6명이항일호국훈장받은김한종의사가문 2

기념관에 함께 있는 체험관
▲ 기념관에 함께 있는 '일우 체험관'. 일우는 김한종 의사의 호다.

김한종 의사의 경우 당신 본인을 비롯해 일가 친인척 중 무려 6명이 항일투쟁을 벌였고 모두 다 훈장을 받은, 진정 위대한 가문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김한종 의사, 아버지 김재정 선생, 작은 아버지 김재풍 선생, 5촌 당숙 김원묵 선생, 6촌 김재철 선생, 7촌 김재창 선생 이렇게 6명이다.
 
도민리포터가 김한종의사 생가 기념관에 찾아가 김한종 의사의 손자이면서 기념관장인 김경식 선생으로부터 관련 사실을 듣고, 기념관을 둘러본 후 보훈처를 통해 이분들의 공훈 사항을 직접 받아 전한다.
 
김한종의사 위패를 모신 사당
▲ 김한종의사 위패를 모신 사당

김한종 의사 영정
▲ 김한종 의사 영정

사당에서 본 마을 전경. 지난 1월13일, 눈이 하얗게 내린 오후 풍경이다.
▲ 사당에서 본 마을과 산자락 전경. 지난 1월13일, 눈이 하얗게 내린 오후 풍경이다.

감옥처럼 설계한 기념관. 입구도 일부러 녹슨  철제로 만들었다.
▲ 감옥처럼 설계한 기념관. 입구도 일부러 녹슨 철제로 만들었다.

먼저 김한종 의사.
1916년 7월에 김경태 김재창과 함께 조선 총독 및 고관들의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사전 검속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김한종은 경상도에서 박상진이라는 인물이 국권 회복을 위해 널리 동지들을 모은다는 말을 듣고 채기중의 소개로 1917년 경주로 그를 방문하여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였다. 이때 김한종은 대한광복회 충청도 지부장에 선임되었다.

대한광복회는 무장 투쟁을 위하여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했다. 충청도지부의 군자금 모집은 지부장인 김한종의 책임 하에 전개되었으며, 다른 어떤 지역보다 활발했다.
그러나 이미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부호들의 비협조로 군자금 모집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의 모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에 김한종은 김경태에게 지령하여 친일 분자인 도고면 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김한종은 체포되어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한종 의사의 장손인 김경식 선생이 기념관에서 김한종의사의 항일투쟁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 김한종 의사의 장손인 김경식 선생이 기념관에서 김한종의사의 항일투쟁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기념관 내부.
▲ 기념관 내부.

6명의 업적과 항일투쟁사를 기록한 석비.
▲ 6명의 업적과 항일투쟁사를 기록한 석비.

항일 투쟁과 후학 양성에 힘썼던 김한종 의사 일가의 가계도.
▲ 항일 투쟁과 후학 양성에 힘썼던 김한종 의사 일가의 가계도.

사형언도를 받을 당시의 김한종의사 사진모습
▲ 사형언도를 받을 당시의 김한종 의사 사진모습

김한종 의사가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 김한종 의사가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아버지 김재정 선생이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 아버지 김재정 선생이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아버지 김재정 선생.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 중 예산지역에서는 지부장 김한종 의사 집안의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였기에 당연히 아버지가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를 중심으로 일가인 김재인 김원묵 김완묵 김성묵 등과 가문 이외의 인물들에게 광복회 충청도지부의 많은 일을 맡기거나 함께 활동을 했다.
1918년 1월 친일파 아산군 도고면장 살해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작은아버지 김재풍 선생이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과
▲ 작은아버지 김재풍 선생이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과 훈장증, 영정 사진.

작은아버지 김재풍 선생.
김한종 의사의 아버지 김재정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성리학 및 한의학에도 능통했다. 조카인 김한종 의사를 도와 대한 광복회에 참여하여 고시문에 날인하는 인장을 직접 새겨 김의사에게 전달했으며 충청도에서 군자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만주 지방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80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았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5촌 당숙 김원묵 선생.
▲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5촌 당숙 김원묵 선생.

5촌 김원묵 선생.
김한종 의사의 일가로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에 대한 포고문 발송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1918년 1월 친일 활동을 자행하던 도고면장 처단에 함께 참여하고 처단시 사용한 권총을 보관하고 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83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았다.
 
6촌 김재철 선생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혁명기지를 발판으로 하여 적시에 폭동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6년부터 전국 각처로 조직을 발전시키는 한편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폈다. 1918년 1월 김한종 의사등과 함께 친일파였던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였을 때, 그는 이들을 자신의 집에 은닉시키고 처단시 사용한 권총을 보관하고 있다가 김원묵에게 인도하는 등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후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재풍 선생에게 보낸 김재창 선생의 서신.
▲ 김재풍 선생에게 보낸 김재창 선생의 서신.

7촌 김재창 선생.
김한종 의사의 일가로서 예산에 설치했던 미곡상을 담당하였으며 인천 등지의 연락 거점과 활동 연계를 이루며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았다.
 
이상이 김한종 의사 일가 6명의 애국지사들의 빛나는 항일투쟁사다. 그 업적의 크고작음을 떠나 일가에서 이렇게 6명씩이나 나서서 국권회복을 위해 고군분투 했다는 사실은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너무나 크다.
 
김한종 의사의 친필 서신. 대단한 명필임을 알수있다.
▲ 김한종 의사의 친필 서신. 대단한 명필임을 알수있다.

김경식 선생이 일본군이 독립군을 살해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 김경식 선생이 일본군이 독립군을 살해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일본군이 잔인하게 살해한
▲ 일본군이 잔인하게 살해한 한국인 시체

김한종 의사, 그리고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상진 의사에 대한 일본의 사형선고 판결문.
▲ 김한종 의사, 그리고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상진 의사에 대한 일본의 사형선고 판결문.

김한종의사기념관은 감옥처럼 설계됐다는 점에서 다른 독립지사들의 기념관과 약간 차원이 다르다.
김한종 의사는 공주감옥, 대구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는데 당시 지하 감옥에서 고문 받으며 희미한 창으로 조국 광복을 염원했던 의사들의 혼을 기리는 뜻에서 이렇게 설계한 것이라 한다.
기념관은 희미한 빛, 왜곡된 선, 감옥 같은 콘크리트, 왜곡된 역사의 경사, 시간을 담은 녹슨 철판의 진입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바닥, 천장으로부터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의사들이 고통받던 감옥, 차가운 벽, 희미한 빛, 동지들의 함성, 위에서는 의사들의 혼이 환생한 듯 박쥐가 천정에 매달리어 광복의 빛, 통일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기념관에는 김한종 의사가 사형 직전 감옥에서 동지들, 가족과 나눈 편지의 글들이 있다. 김좌진 장군과의 이별시, 아버지인 김재정 의사와 나눈 편지, 김재풍 의사와의 편지, 만주로 군자금을 보낸 글 등...

오늘날 우리 국민들 모두 극일을 통해 나라의 정기를 바로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김경식 선생.
▲ 오늘날 우리 국민들 모두 극일을 통해 나라의 정기를 바로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김경식 선생.
   
기념관 천장에 걸려 있는 광복문 현판. 오늘날 우리의 평화와 행복은 이렇게 우리가 광복을 맞게 해준 김한종 의사와 그 일가 모든 애국지사들의 항일투쟁 덕분이다.
▲ 기념관 천장에 걸려 있는 광복문 현판. 오늘날 우리의 평화와 행복은 이렇게 우리가 광복을 맞게 해준 김한종 의사와 그 일가 모든 애국지사들의 항일투쟁 덕분이다.

의사께서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 순국하셨지만 그 얼과 혼, 그리고 민족정신은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것이다.
특히 의사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다같이 참여했던 다른 5명의 호국지사 모든 분들의 기개와 용기, 애국심 또한 후세의 우리 모두에게 가슴 깊이 새겨질 일이다.
 
김한종 의사 생가 기념관 :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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