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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배우고 체험하는 이응노생가 기념관

2016.08.02(화) 01:56:54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2011년 11월 8일에 개관한 이응노 기념관은 콘크리트와 자연 그대로의 나무의 결을 살린 외관 덕분에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 이응노 화백은 이곳에 태어나 17살까지 살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면에 보이는 기념관에서는 그의 흔적과 유물, 그림들을 접해볼 수 있다. 

고암이응노 생가 기념관
▲ 고암이응노 생가 기념관

기념관 입구
▲ 기념관 입구

기념관은 마치 일본에 있는 미술관을 보는 듯한 공간 설계가 엿보인다. 이응노 기념관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군살을 쏙 뺀듯한 모습으로 수수하기 그지없다. 겉에서만 보면 지극히 평범하게 설계한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와 설계의 수준만 보면 노출 콘크리트의 대가 안도 타다오의 느낌마저 묻어난다.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은은하면서도 편안함을 선사하고 공간 구성은 군더더기가 없다.
 
공간구성
▲ 공간구성

공간이 좁은 듯 하지만 저 앞으로 나아가면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하고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의 만남이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전시공간과 이동하는 공간의 확실한 구분으로 작품을 감상할 때는 긴장감을 주고 다시 나와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는 다시 풀어주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응노 화백의 작품
▲ 이응노 화백의 작품

지금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전문분야만 잘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조각가이면서 화가, 발명가, 기술자,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 가등 수많은 분야에 다양한 능력을 보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 역시 다양한 분야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근대 화가인 고암 이응노 화백은 어릴 때 배웠던 서예를 문자 추상에 접목시켰다. 그의 문자추상 작품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로 피에르 자키야르와 함께 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토테미즘이 묻어 있는 작품
▲ 토테미즘이 묻어 있는 작품

오래된 고목으로 만든 작품으로 동물 같아 보이기도 하고 추상적인 작품 같아 보이기도 하다. 예술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술가들은 생전에 인정을 받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상당수의 예술가들이 사후에 그 작품을 인정받는다. 이응노 화백은 전통 미학을 뿌리로 하여 아시아와 유럽의 근현대적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색채를 완성해갔다. 토테미즘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 난다.
 
빛과 어둠
▲ 빛과 어둠

이응노 기념관을 처음 들어가면서 받은 느낌은 한 번에 끝까지 관통해 볼 수 있도록 공간 설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직선의 미학을 살려 공간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공간이 막혀 있기도 하고 어떤 공간에서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가 하면 안락하게 느껴지는 공간도 따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근현대사의 질곡과 함께 했던 이응노 화백의 인생을 담아 설계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기념관의 건물은 낮은 2층으로 자연지형을 해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만들어져 있다. 입구의 연지공원에서 보면 기념관은 그냥 언덕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을 찍는 가족
▲ 사진을 찍는 가족

사람들이 찍는 사진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아마 인물사진일 것이다. 전신사진부터 반신 사진, 얼굴 신체의 특정부위의 촬영 등 지금은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때 중심에 두고 찍는 것보다 비대칭이나 삼 분할하여 찍는 것도 좋다. 이응노 기념관은 빛과 어둠이 적당히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진이 잘 나오는 편이다. 

수덕여관
▲ 수덕여관

수덕여관이라는 곳이 이응노 화백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수덕여관은 예산 수덕사 경내에 있는 초가집으로 이응노 화백이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 사용한 집이다.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수덕여관에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지금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조각작품
▲ 조각작품

군상 시리즈로 유명한 이응노 화백은 적지 않은 조각 작품을 남겼다. 약 20여 년간 1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나무 도시락과 간장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특히 공간을 표현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주어진 모든 것을 작품 재료로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던 이응노 화백은 창작 자체가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한다. 

미술대회에 참여한 작품들
▲ 미술대회에 참여한 작품들

기념관에서는 매년 이응노 화백의 이름을 딴 미술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그때 참여했던 아이들의 작품이 한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이 아이들 중에 이응노의 예술혼을 이어갈 수 있는 누군가 나올지도 모른다. 

길게 나있는 공간구성
▲ 길게 나있는 공간구성

오르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완만하고 내리막이라고 하기에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고 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다. 크지 않은 건물의 공간을 잘 활용하고 있다. 도시공학이나 건축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르 꼬르뷔지에라는 이름은 물리학계의 아인슈타인만큼이나 절대적이다. 르 꼬르뷔지에는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게 될 미래를 예언했다.

그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기념관은 주거를 위한 건축물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을 가두는 공간으로 전락해버린 주거 건축물과 달리 이곳은 여유가 있고 묘한 매력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기념관을 떠나며
▲ 기념관을 떠나며

이응노 기념관을 살펴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단어가 있었다.   
'교육'
 
학교에서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한 활동을 말하며 사회에 나와서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을 받는다는 의미는 어떻게 보면 수동적이다. 자신 스스로 성장하고 배우고 싶싶은 사람들은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한다.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그 일을 혹은 시험을 치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을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새롭게 접하고 배우게 되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이다. 
 
이응노 생가 기념관 :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이응노로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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