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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백제 수도 사비(부여)의 외곽방어선 구축

부활하는 백제왕국(6)-부여 나성

2015.09.17(목) 20:44:20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부여 나성은 토성과 석성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이다.

▲ 부여 나성은 토성과 석성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이다.



천연의 방어막 ‘백마강’과
조화이루며 총 연장 6.3km
 
점질토와 사질토 교차하며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 사용
 
일본 후쿠오카현 수성이나
대야성 등에 축성방식 전파
 

궁남지에서 부여대교를 가다 보면 ‘군수리(軍守里)’ 가 나타난다.
백제 때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당시에는 번창했던 마을이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황폐화되면서 잡초만 우거졌다가 조선 중엽부터 촌락을 형성해 지금의 형태에 이르렀다.

사비 백제당시 수도를 방어하던 군사들이다.
백제군은 사비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부소산성과 외곽인 부여 나성에 배치됐다.

부소산성이 왕궁의 방위를 위한 것이라면, 부여 나성(羅城·외성으로서 성 밖에 겹으로 쌓은 성)은 청산성, 청마산성과 함께 사비의 외곽 방어선이다.

삼국 시대의 도성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흙을 다져 쌓은 나지막한 토성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집이 세워지고 밭으로 깎이고 하여 그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곳이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그래도 부여읍 외곽을 두르는 선처럼 군데군데 토축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성은 토성과 석성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축조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사용됐다. 기본은 판축기법이다.

연약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차해 다져가면서 성체를 쌓아 성벽의 강도를 높이는 독특한 기법이다.

저습지에서는 나뭇가지와 점토를 번갈아가면서 쌓아 올리는 부엽공법이 사용됐다. 비 등 습기에 약한 단점을 보완해 토성이 더욱 단단하도록 한 선조의 지혜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 성벽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나무기둥을 양쪽에 박아 토성의 무너짐을 방지했다.

나성은 성왕대(523~553)에 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완성된 시기는 7세기 초인 무왕대로 추정한다.
크게 동쪽 나성, 남쪽 나성, 서쪽 나성으로 갈라 볼 수 있다.

부소산성의 동문 부근 영일루 앞에서부터 동쪽으로 약 500m쯤에 있는 청산성을 거쳐 남쪽으로는 석목리 필서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의 봉우리로 해서 금강변까지가 그 동쪽이다.

부소산성 서문 바깥에서 유스호스텔 자리로 해서 관북리, 구교리, 동남리, 군수리로 이어졌던 것이 서쪽 나성이디.

동리, 중리, 당리의 뒷산을 연결한 것이 남쪽 나성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길이는 6.3㎞에 이른다.

현재는 청산성 동쪽 약 200m와 석목리에서 동문다리까지, 필서봉에서 염창리까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사적 제58호로 지정되었다.

나성은 곧 사비 도성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 안에는 왕궁과 관아, 민가, 사찰 등이 있었을 것이다.
나성의 모습을 그나마 쉬이 알아볼 수 있는 곳은 신동엽 시비가 있는 금강변에 강둑처럼 남아 있는 곳과 능산리 고분군 앞쪽 길 양 옆이다.

세월에 많이 깎여서 나지막한 둔덕으로나 보이는데, 염창리의 동북문지 부근의 나성 단면은 밑변이 13m, 윗변은 4m, 높이는 5.2m쯤 된다.

문 자리에는 주초석과 문초석 들이 남아 있다.

나성 안에는 백제시대 왕궁을 비롯, 관아·민가·사찰·상가 및 수도수비를 위한 방위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상부·중부·전부·하부·후부의 오부제도(五部制度)를 두고 다스렸다.

전체적인 구조상 남쪽은 금강이 흐르고 있고 또 수로도 파 놓아서 이 나성은 자연적인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주서(周書)」에 따르면, 도성 안에는 민가가 있었으며 방(方)마다 500인씩 총 2,500인의 군대로 방위에 임하였다 한다.

지난 6월에는 부여 나성(청산성 구간)에서 성벽 내측의 배수로 시설과 경사면에 대한 계단식 대지조성시설 등과 나성 폐성 이후 조성된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분묘유구 20기가 확인됐다.
특히 주목할 만한 유물로 연화문전돌과 철제모루의 발견이다.

발견된 연화문전돌은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으로 부여지역 건축유적에서는 최초로 사례다.

나성의 축조시기가 사비천도 이전이었음을 알려주는 추가 단서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철제모루는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모루와 유사한 것으로 크기와 무게는 능산리사지 출토품보다 더 큰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당시 나성(청산성 구간)에서 직접 철제용품을 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김태신 ktx@korea.kr
 


부여 나성은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에서 시작해 청산성 능산리고분을 거쳐 부여읍 군사리까지로 이어져 있다.

▲ 부여 나성은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에서 시작해 청산성 능산리고분을 거쳐 부여읍 군사리까지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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