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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대백제의 찬란했던 향취가 느껴지는 고대 성곽

부활하는 백제왕국(5)-공주 공산성

2015.09.17(목) 15:51:01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deun127@korea.kr
               	deun127@korea.kr)

백제시대 왕성으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공주 공산성은 동서가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에 달한다. 총 성곽길이는 2,660m이며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백제시대 왕성으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공주 공산성은 동서가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에 달한다. 총 성곽길이는 2,660m이며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웅진백제시기(475~538년)
문주왕 이후 64년간 왕성

 
금강을 따라 차를 달리다 보니 왼편으로 웅장한 공산성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용이 굽이치듯 산세를 따라 성곽이 강위를 스치듯 지나가다가 하늘로 용솟음친다.

특이하게 공산성은 계절마다 매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름이 실록이 우거져 한 폭의 수묵화라면, 겨울은 성벽위로 눈 쌓인 모습이 유화를 닮았다.

매표소를 지나자 금서루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공산성 4곳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건물로 지어졌다.

햇볕을 피해 문루에 드리운 그늘 속에서 있자, 외국인 관광객들이 땀을 흘리며 산성을 내려온다.
산성의 길이는 총 2,660m.

진남루로 해서 영동루-광복루-연지 만하루-공북루-공산정(전망대) 등 성곽길 코스로 내려오는 길이란다.
1시간30분 남짓 걸린다.

“너무 멋있어요. 1400년 전으로 돌아가 백제시대 군사들이 걸었던 길을 함께 했다는 느낌이에요.”
캐나다에서 단체로 왔다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공산성 둘러보기 코스는 왕궁지 코스(소요시간 30분)와 금강바람 코스(45분) 등이 있다.
백제시대 왕성으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명명됐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됐다.
서기 475년 백제 문주왕 원년에 세워졌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긴 뒤 남하해 웅진(현재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공산성은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황 16년에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성은 금강에 접한 해발 110m의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인조와 선조 이후에 지금의 석성으로 개축됐다. 현재 동쪽의 735m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성이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돌로 쌓아 높이 약 2.5m인데, 전면만을 석축했다. 내면은 토사·잡석으로 다져 붙였고, 너비는 3m이다.

동쪽 성벽 밖에 토성이 있는데, 높이는 무너져서 알 수 없으나 너비는 약 3m이다. 서쪽 성벽은 본래 토축(土築)된 위에 돌로 쌓아 외면만을 축조했고 높이는 4m 정도이다.

공산성의 면적은 동서가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에 달한다.

동서남북 네 곳에서 문터가 확인됐다.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었고, 1993년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와 금서루로 명명하였다.

이곳은 백제시대 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감영을 비롯해 중군영 등 중요한 시설이 있었다. 성내에서 왕궁지(王宮址)를 비롯해 백제시대 임류각(臨流閣), 연지와 통일신라시대의 건물터가 발견됐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적인 쌍수정(雙樹亭), 영은사, 쌍수정사적비, 만하루, 명국삼장비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또 성내에 우물터 3개가 발굴됐다.

백제의 많은 유적 중 공주성이 중요한 이유는 지난해 백제시대 완전한 형태를 갖춘 대형 ‘목곽고(木槨庫)’와 백제 멸망기 나당연합군과의 전쟁 상황을 추론할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목곽고는 목재로 만든 저장시설로 복숭아씨와 박씨가 다량 출토됐다. 이와 함께 무게를 재는 석제 추와 생활용품인 칠기, 목제 망치 등의 공구도 수습됐다.

이는 당시의 목재 가공 기술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백제시대 건물 복원과 연구 등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또 완전한 형태의 철제 갑옷, 옻칠이 된 마갑(馬甲), 철제 마면주(말의 얼굴 부분을 감싸는 도구), 마탁(馬鐸·말에 매다는 방울)과 함께 대도(大刀), 장식도(裝飾刀) 등이 발견돼 당시의 전쟁기록도 엿볼 수 있다.
갑옷에는 645년이라는 글씨가 남아있어 갑옷의 제작 및 사용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김태신 ktx@korea.kr
 

 

눈 덮인 겨울 공산성의 모습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 눈 덮인 겨울 공산성의 모습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1)왕궁지(王宮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다. 1985~1986년 총 2년에 걸친 발굴조사 때 10칸, 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다.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2)쌍수정(雙樹亭)
쌍수정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파천했을 때 5박6일간 머물렀던 곳이다. 쌍수에 기대어 왕도를 걱정하던 인조가 평정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쌍수에 통훈대부(通訓大夫·조선시대 문신 정3품 하계(下階)의 품계명)의 영을 내렸다는 유래가 있다,
 
3)임류각(臨流閣)
백제 동성와 22년(500)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서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1980년에 공산성에서 발굴 조사된 추정임류각지의 구조를 근거로 1993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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