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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멸망했던 백제문화가 부활한다

옛 백제도읍지 공산성을 찾아서

2015.09.01(화) 22:02:09 | 원공 (이메일주소:manin@dreamwiz.com
               	manin@dreamwiz.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주공산성  관무인 금서루가 ? 도읍지로 안내하고 있다.

▲ 공주공산성 관무인 금서루가 도읍지로 안내하고 있다.


공주 공산성은 백제의 피난처였다. 백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과 싸우다 죽자, 이에 위협을 느낀 그의 아들 문주왕이 부득이 도읍을 옮긴 곳이다. 도읍을 옮긴 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에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는 과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었는가? 결국 행정수도로 축소되지 않았는가? 당시에도 도읍을 한강유역에서 웅진으로 옮기는 것에 수구세력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천도를 반대한 무인세력 해구에 의하여 문주왕은 살해되고, 그의 아들 삼근왕까지 3년만에 병사하였다. 손자 동성왕이 신하에 의하여 또 살해되자 왕권이 크게 흔들리며 국가의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결국 무령왕이 아버지 동성왕을 살해한 신하를 엄벌에 처하면서 왕권을 다시 찾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아들 성왕이 전성기를 맞는다.
 
큰 나라로 발전하기에 웅진이 도읍으로 비좁다고 생각한 성왕은 다시 사비(부여)로 옮기게 된다. 이로써 공산성은 약 63년간의 도읍지로 길지 않은 역사를 끝내고 만다. 그 후에도 조선의 임금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6일간 피신처로 머물렀다고 한다. 결국 공산성은 백제의 임시수도 이자 왕들의 피신처였던 것이다.
 

만하루에 여름하늘 활짝 열려 있다.

▲ 만하루에 여름하늘이 활짝 열려 있다.



그러나 백제는 개방정책을 펴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활발히 교류를 했으며, 불교문화가 매우 발달하여 그 영향이 일본에까지 미치는 문화대국이 되었다. 지금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는 바람에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인의 혼을 담은 예술품이 곳곳에서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도 그렇고,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지금도 남아있는 미륵반가사유상과 백제관음상은 예술품으로써 세계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당시의 백제가 군사적으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선진국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공산성의 입구인 금서루에 올라섰다. 길게 누운 성곽을 바라보니 무언가 알 수 없는 비애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잠시 머문 도읍지라지만 면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다. 도읍지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그냥 군사요충지 같은 느낌이다. 만일 백제가 멸망하지 않고 신라처럼 삼국을 통일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신라 경주보다도 더 찬란한 문화유적을 남겼을지 모른다. 백제의 문화가 삼국 중에서 가장 발달하지 않았던가? 지금 남아 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다.
 

공산성내에 있는 영은사에 노랗게 가을이 떨어지고 있다.

▲ 공산성내에 있는 영은사의 가을



공산성은 성곽을 따라 걷는 것 외에 딱히 시선을 끄는 것이 없다. 도읍지라야 건물이 다 파괴되어 없어지고 탑하나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인조가 잠시 머물렀다는 쌍수정이라는 곳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삼남의 관문이었던 진남루를 지나 동쪽성곽으로 오르니 동성왕이 연회를 위해 지었다는 임류각이 나타난다. 이것 역시도 후에 복원된 건물이라 한다. 성곽을 따라 만하루로 내려오며 금강을 바라보았다. 풍경이 참 시원하고 좋아 걸음이 저절로 멈춰지고 말았다.
 
그곳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백제의 옛 도읍의 풍경은 다 어디로 가고, 저 금강만이 말없이 흐르고 있는 건가? 만일 금강조차 흐르지 않았다면 참으로 허망했을 것 같다.
 
공산성에 백제인의 옛 예술혼을 다시 끄집어 내 옛 모습을 살려내면 어떨까? 백제가 망하기 직전 웅진으로 옮겨와 다시 부흥하기까지 공산성은 백제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기였다고 본다. 왕들이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되는 혼란기를 끝내고 백제 문화의 중흥을 이루었다는 점은 공산성이 임시 도읍지로 역할이 매우 컸다고 생각된다. 다시 백제의 문화를 부활시키는 의미에서 60년 도읍지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백제 문화제에서 왕의 행차를 재현 모습

▲ 백제 문화제에서 왕의 행차를 재현 모습

공산성앞에 돛배가 진을 치고 있는 모습

▲ 공산성앞에 돛배가 진을 치고 있는 모습

연미산에서 바라본 금강의 모습

▲ 연미산에서 바라본 금강의 모습

유채꽃이 활짝핀 공주 금강 모습

▲ 유채꽃이 활짝핀 공주 금강 모습

붉은 노을이 공주 금강을 적시고 있다

▲ 붉은 노을이 공주 금강을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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