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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청나라와 화친 불가론을 말하던 윤집의 묘

2015.08.31(월) 19:52:08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가적인 전란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청나라에 의해 조선땅은 유린이 됩니다.

이때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세력과 화친을 절대 할 수 없다는 세력이 충돌하였는데 화친 불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중에 윤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윤집이라는 사람의 묘가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산 19-50에 있더군요.
 

내산 윤집묘로 가는 이정표

▲ 내산 윤집묘로 가는 이정표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의 한 사람인 윤집은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극심한 반대를 합니다. 결국 윤집은 청나라로 끌려가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이때 홍익한, 오달제가 같이 사형을 당합니다.


 

윤집을 기리는 비

▲ 윤집을 기리는 비


윤집의 묘로 가는 길에는 이런 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윤집 선생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청나라에 의해 사형을 당했지만 당시 청 태종은 그들의 높은 절개를 기리고 백성들이 본받게 하고 '삼한산두'라는 휘호를 내리고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요령성 심양시에 가면 삼학사 유적비가 있습니다.

 

윤집의 묘로 올라가는 계단

▲ 윤집의 묘로 올라가는 계단



누구의 묘소인지도 모를 만큼 풀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비석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면 누구의 묘인지도 몰랐을 겁니다.


 

윤집의 묘

▲ 윤집의 묘


윤집을 비롯한 삼학사가 청나라로 끌려갈 때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같이 가게됩니다. 심양관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같이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은 돈을 받고 풀어주었는데요. 이때 양반, 평민, 노비 모두 만주족의 노예로 전락하여 노예시장에서 매매되었다고 합니다.
 

세월의 흔적

▲ 세월의 흔적


시간이 지나 이제 얼굴 없는 모습으로 그자리에서 묘를 지키고 있는 석상의 모습입니다.


 

이국땅에서 죽다

▲ 이국땅에서 죽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현명한 중립외교를 실시했다면 윤집을 비롯한 삼학사는 이국땅에서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은 명분에 사로잡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우는 무모한 배금정책을 실시했는데요. 결과적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사후에 영의정이 되다

▲ 사후에 영의정이 되다


윤집은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공부해서 1627년에 생원이 되고 1631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합니다. 5년 뒤인 1636년 이조정랑을 거쳐 교리에 있을때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화의 불가론을 주장하다가 1년뒤에 청나라로 끌려가 죽는데요.

그때가 30대 초반의 나이 였습니다.  처음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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