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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조선과 역사를 같이한 공주향교

오강표 열사의 흔적

2015.02.04(수) 20:46:51 | 지민이의 식객 (이메일주소:chdspeed@daum.net
               	chdspeed@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공주는 충청도의 주요 군현으로 백제시대부터 요지로 자리잡아왔다. 고려시대부터 건립되어 내려왔다는 공주향교는 기록상으로 조선태조 7년(1374) 웅진동 송산 기슭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해군 14년 (1622)에 화재로 인하여 일부 전소된 것을 인조1년 (1623)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국가로부터 각종 예산을 지급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이후 전통향사만 전속되어 내려오고 있는 상태이다.
 

공주향교

▲ 공주향교


홍살문을 지나면 이렇게 향교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우측은 향교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고직사가 자리하고 있다. 공주향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개화기에는 근대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 제기고에는 89종 337책의 고서가 소장되어 있다.

관리사인 고직사

▲ 관리사인 고직사


향교 우측건물인 고직사에는 이렇게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공주향교의 앞마당

▲ 공주향교의 앞마당


충청남도의 중심이였다는 공주의 향교치고는 그 규모가 작은편이다. 큰 고을이 있던 이곳 공주의 향교를 전주향교 등과 비교해보면 그 규모는 작다. 건물등의 규모는 작지만 부지면적은 넓은 편이다. 정면에는 명륜당이 보이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숙소들이 위치해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가운데 3칸통은 대청마루로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좌우에 한칸씩 각각 온돌방이 자리하고 있다.

공주향교의 고목

▲ 공주향교의 고목


오래된 고목들이 공주향교 앞마당에는 이렇게 자리하고 있다.

공주향교 대성전

▲ 공주향교 대성전


공주향교의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3칸, 뒷면 2열을 내부 공간으로 꾸며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동무.서무는 대성전 앞에 가운데 마당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3칸, 측면2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열은 내부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공주향교의 건물들

▲ 공주향교의 건물들


공주향교도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동재는 반오량 구조에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서재역시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만들어져 있다.

오강표 열사가 울분을 토한 공주향교

▲ 오강표 열사가 울분을 토한 공주향교


공주향교인 강학루는 오강표 열사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이은 1910년의 한일 합병으로 국권을 박탈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던 오강표 열사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교육을 하는 곳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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