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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이역만리 마카오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다

2014.06.25(수) 23:12:53 | 길자(吉子) (이메일주소:azafarm@naver.com
               	azafarm@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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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6일, 저 길자는 마카오를 다녀왔습니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홍콩여행 중 하루를 시간내어 다녀온 마카오는 무척이나 특별했습니다. 도박의 천국으로 알려진 마카오, 하지만 이곳 마카오에서 우리나라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무려 4년이 넘는 기간동안 신학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저 길자부부가 그 흔적을 찾아 마카오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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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마카오까지는 고속 페리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걸립니다. 홍콩과 마카오는 각각 1997년과 1999년에 중국으로 반환되었지만 두 곳을 이동할 때도 출입국 수속을 할 정도로 강력한 자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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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우선 마카오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인 세나두 광장으로 향합니다. 마카오는 1557년 포르투갈인이 해적토벌에 대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마카오 반도를 특별 거주지역으로 조차하였으며 이후 1849년, 마카오를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하고 마카오 전체 영토를 포르투갈이 점령하게 됩니다. 때문에 마카오 중심가는 마치 남유럽의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많은 서구식 건축물이 늘어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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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두 광장에는 시 정부청사를 비롯하여 마카오 최초 성당인 성 도미니크 성당, 성 아우구스틴 성당 등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했을 당시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세나두 광장에서 행인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저 멀리 세인트 폴 성당 유적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인트 폴 성당은 1835년 화재로 인하여 현재와 같이 정면 외벽과 지하실만 남게 되었는데 두해가 지난 1837년 6월 7일, 김대건 신부가 이곳 마카오에 도착하셨다고 하니 김대건 신부는 그야말로 "잿더미"가 된지 얼마 안 된 성당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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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폴 성당 지하에는 17세기에 순교한 일본과 베트남 순교자를 비롯한 성직자의 무덤이 있습니다. 또한 16~19세기에 제작된 대표적인 종교유물도 전시하고 있었는데요 중국의 전통과 교회의 상징이 조화를 이룬 아시아 초창기 교회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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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폴 성당 뒤편으로 넘어가면 성 안토니오 성당이 나옵니다. 성 안토니오 성당은 1560년에 지어진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식민지 초기에 유일한 성당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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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환한 분위기로 식민지 지배 당시 포르투갈 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자주 열렸다고 합니다. 많은 행사로 인해 연중 내내 꽃 장식이 성당 내외부를 가득 메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곳 성 안토니오 성당은 "꽃의 성당"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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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성 안토니오 성당 별실에서 드디어 김대건 신부의 성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곳 마카오에서 두루마기 입고 갓 쓴 성상을 볼 줄은 한국을 떠나기 전엔 상상도 못했는데요 김대건 신부는 이런 먼 곳까지 오셔서 신학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이 정말 대단하게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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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까몽이스 공원입니다. 포르투갈의 문화 카몽스를 기리는 공원으로 이 공원 한켠에도 역시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있다고 하여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공원 인근에는 우리나라 탑골공원과 같이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장기 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그 모습이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아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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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의 공용어는 광동어지만 오랫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이유 때문인지 안내 표지판에는 포르투갈어를 병행하여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짧은 한자 실력과 안내판에 적혀있는 "Kim"이라는 단어가 아니었으면 김대건 신부 성상이 있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오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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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잔디밭 저 멀리 갓을 쓴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이날의 마지막 미션이었던 카몽이스 공원 김대건 신부 성상을 찾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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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프랑스 출신인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는 한국 최초의 신학생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 신학교로 보내게 됩니다. 17세의 소년이었던 김대건은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 1842년 2월 15일 마카오를 떠날 때 까지 4년 6개월 동안 라틴어를 비롯한 철학과 천주교 교리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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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 마카오를 떠나 1846년 순교하기까지 김대건 신부의 생애는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마카오를 떠나 요동에 도착한 후 그해 겨울이 되어서야 조선땅을 밟게 됩니다. 비밀리에 서울에 잠입하여 외국 선교사들 입국 준비를 비롯한 집필활동 등을 하였으며 1845년 6월, 드디어 사제에 서품되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가 됩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같은 해 9월 지금의 노량진인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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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8월,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 솔뫼에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 성인이었으며 한국인 최초로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한 학생이며 라틴어와 프랑스어, 서양음악, 서양화 등을 구사할 줄 안 선구자였습니다. 오는 8월 15일, 김대건 신부가 태어났던 솔뫼성지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할 예정입니다.

솔뫼성지에서 열리는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여 아시아 청년들과의 만남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이번 기회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진취적 기상이 재조명되어 지치고 실의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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