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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일제 저항시 '그날이 오면'의 산실 당진 필경사

'상록수'의 작가 심훈선생의 문학의 산실을 돌아본 답사의 감회

2014.04.08(화) 15:00:48 | 이종섭 (이메일주소:dslskj55@hanmail.net
               	dslskj55@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그날이 와서
육조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구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광복의 ‘그날’ 이 왔을 때의 환희와 감격을 형상화한 작품인, 소설 상록수를 쓴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입니다.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이 시어 속에는 어두운 식민지를 살아가는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짐작하게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 바우라는 ‘시와 정치’라는 책에서 이 시를 세계적인 저항시의 예로 들면서 일제의 어떤 압제도 한국 시인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필경사의 심훈선생 문학관

▲ 필경사의 심훈선생 문학관

기념관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민 아담한 공간입니다.


원형대로 복원된 심훈의 집

▲ 원형대로 복원된 심훈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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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의 집
 


생가 안방

▲ 생가 내부


생가 내부

▲ 생가 안방


오늘 도민리포터는 최근에 취재 다녀온 당진 필경사에 대해 기사를 쓰려고 합니다.

부여에 충청남도의 자랑인 신동엽 시인이 있었다면 당진에는 상록수의 심훈 선생이 계시죠.
 
서해안고속도로의 송악 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고대부곡공단 방면으로 가다 한진나루에 닿기 직전 상록초등학교와 상록수교회를 지나면 '필경사'라는 안내판을 만나게 됩니다. 논밭사이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필경사 주차장에 닿습니다.
 
이곳에 바로 그 유명한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이 살며 집필하던 집 ‘필경사’입니다.
 
필경사 건물은 남남동향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로 앞에는 상록수문화관 건물이 들어 서 있습니다. 문화관 뜰에 서면 아산만의 물결과 서해대교가 한눈에 잡힙니다. 상록수문화관에 심훈 선생의 일대기가 간략히 정리되어 있고, 필경사 오른쪽에 심훈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습니다.
뒤로는 대숲이 우거져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냅니다. 여행자들은 심훈 고택과 문화관을 둘러보며 상록수의 스토리를 자연스레 연상할수 있습니다..
 

상록수 상징의 무쇠 조각품

▲ 상록수 상징의 무쇠 조각품


일제저항시그날이오면의산실당진필경사 1

▲ "그날, 쇠가 흙으로 돌아가기전에 오라"


2001년 심 훈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당진군 출신의 조각가가 사철 푸른 상록수를 상징해 무쇠로 만든 조각품이 마당에 있습니다.
 

일제저항시그날이오면의산실당진필경사 2


일제저항시그날이오면의산실당진필경사 3


심훈 선생의 얼굴이 새겨진 조각의 뒷면에 새겨진 글 "내가 화가가 된다면... 반 고흐의 필력을 빌어 뭉툭하고 굵다란 선이 살아서 용같이 꿈틀거리는...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가 새겨져 있습니다.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초가흙집으로 남아있는 필경사, 농촌 한가운데 이 조그만 초막에서 <상록수>가 탄생한 것입니다.
 

필경사 옆의 독립유공자 표지석

▲ 필경사 옆의 독립유공자 표지석


심훈 선생은 1901년 9월 12일 서울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1915년 경성제일고보(후의 경기중)에 입학하여 학문을 연마했고, 3·1운동 때(제일고보 4학년, 19세 때)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붙잡혔는데 나중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그곳 지강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했다네요.
 
심훈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도 재직하던 중 아이가 없어 부인 이해영과 헤어지고, 1930년에 안정옥과 재혼했습니다.
 

기념관 내 선생의 초상화

▲ 기념관 내 선생의 초상화


약력(연보)

▲ 약력(연보)


그리고 선생은 193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곳 당진으로 내려와 한동안 아버지와 한집에 살던중 1934년에 독립하여 살집을 직접 설계하여 짓게 되는데 그 집이 바로 필경사랍니다.
 
필경사는 심훈문학의 산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선생은 필경사에서 창작에 전념하게 되는데 여기서 농촌계몽소설로 유명한 대표작인 ‘상록수’를 비롯해 ‘영원의 미소’ ‘직녀성’등을 집필하였으니까요.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에 당선되었죠.
 
1930년대 일제 강점기 하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청년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 ‘상록수’.
잠깐 내용을 볼까요.
 
상록수는 다 알다시피 샘골강습소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가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성독립운동가 최용신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죠.
 
상록수 주인공인 채영신은 신문사 주최 학생 계몽 운동에 참가한 이후 동혁과 동지로서의 애정을 느끼게 되고 농촌운동에 앞장설 것을 약속합니다.
채영신은 예배당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일본 경찰의 저지를 받자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모금운동을 펼쳐 학교를 세우지만 준공식날 축사를 하던 영신은 과로로 쓰러지고 동혁은 동지의 배신을 경험하고 울분을 참지 못해 농우회관에 불을 지릅니다.
목숨을 걸고 농촌 계몽 운동에 앞장서는 채영신. 이를 이어가려는 박동혁 등 당시 젊은 지식인들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굳건한 의지가 잘 묘사되어 있는 작품이죠.
이렇듯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작품들은 대부분 민족 의식과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계몽주의 문학의 전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훗날 '그날이 오면'의 초고가 된 선생의 옥중 편지. 이 편지는 그의 어머니께 쓴 것입니다.

▲ 훗날 '그날이 오면'의 초고가 된 선생의 옥중 편지(왼쪽 맨 아래)등을 기록한 활동상황판. 이 편지는 그의 어머니께 쓴 것입니다.


어머니께 쓴 편니 확대

▲ 어머니께 쓴 편니 확대본


상록수 등 선생의 작품집 모음

▲ 상록수 등 선생의 작품집 모음


중국 유학 등 선생의 활동상 개요도

▲ 중국 유학 등 선생의 활동상 개요도


문예활동

▲ 문예활동


영화활동에도 활발했던 선생의 열정

▲ 영화활동에도 활발했던 선생의 열정


조카들과 다정한 한때

▲ 조카들과 다정한 한때(왼쪽 아래)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들이자 작품의 배경이었던 지인들과 함께...

▲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들이자 작품의 배경이었던 지인들과 함께...


상록문화제 행사

▲ 상록문화제 행사


앞서 소개한 심훈의 시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그날이 오면’은 1919년 심훈이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어머님께 보낸 편지글중 일부라고 합니다. 그동안 발표된 심훈의 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생은 1936년 9월6일, 너무 이른 나이에 급서하여 그의 문학 새계는 더 펼쳐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선생은 상록수를 직접 각색하고 감독을 맡아 영화로도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다시 구입해서 관리하다가 당진시에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필경사 주소 :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2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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