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박물관의 박문수 유물, 그리고 한명회 묘지석과 묘지와 사당
천안 수신면 속창리에 있는 한명회 묘와 사당입니다.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있습니다. 주변의 큰 석재 테두리가 보이죠?
이게 웬걸까요? 한명회 묘를 만들면서 당시에 이곳이 명당터라는 것을 안 나라에서 그의 기운이 또다시 일어나 어떤 평지풍파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판단에 따라 그의 기운을 누르고자 무거운 석재를 쌓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안박물관의 한명회 묘지석입니다.
이 묘지석은 한명회의 인적사항, 선대 가계(家系), 행적, 관료, 성품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합니다.
묘지석이 발견된 곳은 충청남도 공주시 학봉리 가마터인데 여기서 묘지석 파편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이게 공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묘지석은 모두 24매입니다.
묘지석 탁본은 천안박물관에 있고, 그의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 산 11-1번지에 있습니다.
한명회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고, 이젠 암행어사 박문수입니다.
조선시대에 서민 백성들을 위한 제도중 암행어사만큼 눈에 띄고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각인된 제도는 없는 듯 합니다.
▲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볼때 작성한 시권
그렇다면 암행어사는 박문수 뿐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그런데 왜 암행어사라 하면 박문수부터 떠올릴까요?
특히 조선시대의 명 관료중 암행어사는 박문수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 명재상 체재공도 암행어사 직분을 수행했거든요.
▲ 영의정에 오른 박문수에게 '충헌'의 의미가 담겨 왕으로부터 내려진 '증시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문수가 유명한 이유는 그가 어사로 재직하는 동안 많은 업적과 훌륭한 일을 하고 그것들이 여러 기록에 의해 남겨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참 잘한 암행어사’이기 때문입니다.
▲ 관찰사 비문
암행어사는 특별한 직책으로 비밀리에 임금의 명을 받아 수행하는 관리를 말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감사원의 특별감사팀 정도라 할까요?
이들은 보통 수령들의 비리를 고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죠.
힘없고 가난한 조선 백성들의 마지막 희망이 바로 암행어사였던 것입니다.
조선 시대는 명종 이후 350여 년간, 600여 명의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는데 이 많은 암행어사 중에 오늘날까지도 기억되고 존경받는 암행어사가 박문수입니다.
▲ 왕이 박문수에게 '국록'을 하사한다는 내용이 담긴 녹패(일종의 교지)
경상북도 문경새재의 세번째 관문인 조령관에 가면 이곳에 어사 박문수에 대한 전설이 전한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문경을 지날 때 산봉우리에 마패를 걸어두었는 데 그 때문에 마패봉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군요.
아마 영남 어사로 발령 받아 이곳을 지나다 쉬면서 앞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떤 각오로 임할 것인지 자기의 업무에 대한 소신과 마음가짐을 다진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박문수에 대한 기록중 조선시대 설화집인 <구비문학대계>에는 그의 행적을 기록한 많은 사례들이 전해진다는군요.
열녀에게 뺨 맞은 어사 박문수, 꼬마한테 멸시당한 박문수, 살인자를 찾아 낸 박문수, 박문수와 여자 원혼, 초립동의 원한을 갚아준 박문수, 점장이 덕분에 죽음 면한 박문수 등입니다.
▲ 박문수 홍패
암행어사 시절 박문수가 백성들에게 베푼 선정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것은 어사 박문수에 대한 무수한 전설과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졌다죠.
그의 행적이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그다지 큰 의미를 둘만큼 훌륭하지 않고 사리사욕만 탐했다면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민감한 백성들이 그 많은 이야기를 전할 턱이 없습니다. 되레 손가락질과 욕만 했겠죠.
그래서 그의 업적과 행적이 더 존경받는 것입니다.
이 내용들을 일일이 다 풀어서 기록할수는 없기에 한가지 일화만 들어보겠습니다.
박문수가 어느날 홀어머니와 아들, 단둘이 사는 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장가를 들지 못하여 고민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좋아하는 처자가 있었지만 처자의 집에서 가난한 집에 딸을 보낼수 없노라고 반대하고 있다 했습니다.
박문수는 즉시 그 처자의 아버지를 만나 담판을 짓고 혼사를 성사시킨후 부유했던 그 집 재산의 절반을 새로 맞는 사위와 그 노모에게 주도록 했다 합니다.
▲ 박문수 비문 탁본
박문수는 지방관리들의 폭정을 감시하는 일만 한게 아니라 이렇듯 나이가 차도록 결혼을 못한 남녀들의 혼인 문제까지 나서서 처리할 정도로 민생 문제에도 귀를 기울인 어사였는데 그 또한 실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서울 밖의 처녀로 나이가 20, 30이 넘도록 시집 못간 자가 매우 많아 원망이 가슴에 맺혀 화기(火氣)로 손상할 것입니다."
1730년 12월 24일에 박문수가 영조에게 간한 말로서 영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오직 백성을 살피고 돌보는 데 전념했던 박문수,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아로새겨진 명 관료이며 자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