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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377년전(1636년, 인조 14)의 1월에 어떤 일이?

병자호란과 3학사의 충절이 모셔진 부여 창렬사 답사

2014.01.27(월) 12:43:54 | 김진순 (이메일주소:dhjsdk44@hanmail.net
               	dhjsdk4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1636(인조 14)년 12월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까지 우리나라 조선에서 일어났던 전쟁. 그것도 치열한 일진일퇴의 공방이 아니라 아주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수치스런 역사로 남은 기억의 전쟁.
그 전쟁은 병자호란입니다.
 
특히 377년전의 이번 1월은 그때 중국 청나라의 태종 앞에서 인조가 나아가 항복의식을 거행한 달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500년 역사를 놓고 볼때 비록 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임진왜란 같은 전쟁때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라는 걸출한 역사의 영웅 덕분에 그들을 몰아낼수 있었지만, 병자호란은 짧은 시간에 치욕의 역사를 맛본 전쟁으로 남아 있습니다.

부여 창렬사

▲ 부여 창렬사


창렬사 입구

▲ 창렬사 입구


충남 부여에는 창렬사라는 사우(사당)가 있습니다.
377년전 1월, 인조가 청태종 앞에서 무릎 꿇고 항복의식을 거행하던 이맘때를 전후해 현재의 창렬사는 그때 일과 어떤 관계에 있는 사당일까요.
 

창렬사 외삼문

▲ 창렬사 외삼문


창렬사 강당

▲ 창렬사 강당


창렬사 내삼문

▲ 창렬사 내삼문


부여 창렬사는 삼학사(三學士)라고 불리는 조선 중기 충신 윤집(1606∼1637), 오달제(1609∼1637), 홍익한(1586∼1637)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입니다.

병자호란 때인 인조 14년(1636)에 조선을 속국으로 하려는 모욕적인 문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을 살려 보내지 말자고 주장하였으나, 이듬해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모욕적인 화의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삼학사 3분은 청나라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청태종이 직접 이들의 심문에 참가하여 설득과 회유를 하였으나 심한 고문을 견디면서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다가 결국 중국 심양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청태종도 이들의 기개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후대인들도 이들을 삼학사라고 부르고 높은 충절과 고귀한 죽음을 기렸습니다.

그들의 고결한 절개를 지키고자 숙종 43년(1717)에 이곳에 사당을 세웠고 경종 1년(1721)에는 ‘창렬사’란 현판을 임금이 내렸다고 합니다. 특히 창렬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삼학사의 위패가 봉안된 창렬사

▲ 삼학사의 위패가 봉안된 창렬사 사당 안채


사당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습니다. 내삼문을 거쳐 아래로 내려가면 강당 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근래 지은 외삼문이 있습니다.<창렬사 표지 안내문 발췌>
 
그러면 여기서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청과 화약할 것을 거부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3명, 즉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삼학사를 알아보고 가죠.
 

사당 내부

▲ 사당 내부


윤집 선생 위패

▲ 윤집 선생 위패


홍익한 선생 위패

▲ 홍익한 선생 위패


오달제 선생 위패

▲ 오달제 선생 위패


윤집, 오달제, 홍익한 이렇게 3명의 신하들은 청나라와의 전쟁이 이어나기 전, 정묘호란이 먼저 일어났는데 당시부터 이미 그쪽과의 화친을 거부하면서 청의 눈 밖에 난 조선의 충신들이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제2차 침입인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청에게 항복하면서 청이 항복을 받아준 후 철병하는 조건으로 이 3학사를 잡아서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윤집, 오달제는 청군이 철군하면서 동시에 압송했고, 홍익한은 평양부윤으로 재직중이어서 추후에 체포당해 청으로 끌려갔습니다.
 
1637년 1월 29일, 오랑캐 진영으로 떠날 윤집, 오달제가 인조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는데 윤집은 “이러한 때에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오달제는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하였다고 합니다.
실로 눈물 나는 만고의 충신입니다.
 
그래서 임금이 가족 안부를 물으며 “장차 죽을 곳으로 가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는구나. 그대들이 죄 없이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성에서 나간 뒤에 국가의 존망 역시 단정할 수 없다만 만일 온전하게 된다면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와 처자들을 돌보아 주겠다.”하고 술을 따라 주고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위하여 몸을 소중히 하라. 혹시라도 다행히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하였다고 합니다.
 
청나라는 어쩔수 없이 3학사를 모두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들의 충성심과 절개를 높이 샀고, 특히 청나라 4대황제 강희제는 훗날 다 망해 가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신뢰를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이들의 절의를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발견된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인터넷 캡처)

▲ 중국에서 발견된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인터넷 캡처)


그런데 청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한 3학사와 관련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중국 봉천에서 ‘三韓山斗’(삼한산두)라는 비석이 발견된 것입니다.

당시 중국의 봉천에서 용을 조각한 비석이 중간이 부러진 채 땅 속에 묻혀있다 발견되었다는데 이 비석에는 ‘三韓山斗’라는 글씨가 있었는데.. 여기의 삼한(三韓)은 조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조선의 태산(泰山)과 북두(北斗) - 태산과 같이 높고 북두칠성과 같이 빛난다 - 라는 뜻인데 이렇게 쓴 비석은 청태종이 이들 삼락사를 친히 국문한 후 이들의 기개에 오히려 감탄하며, 삼학사가 죽고 난 후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던 것입니다.

청나라가 몰락하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비석을 잘 관리되지 못하고 파괴되어 방치되다가 1930년대에 발견되었고 현내 이 비석은 중국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 현재 중국 발해대학에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이런 위대한 선조들의 역사를 잘 알고 갔으면...

▲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이런 위대한 선조들의 역사를 잘 알고 갔으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가르쳐야 할것 같습니다.
 
“너희들의 선조께서 나라를 뺏기지 않으려고 목숨으로 맞서 싸우며 오늘날까지 지켜 내셨단다. 아주 많은 위인과 선각자들이 계셨고, 그중에 병자호란 당시의 3학사 3분은 끝까지 자신의 절개와 충성심을 버리지 않으셨고, 특히 청나라로 끌려간 뒤에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채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며 떠나셨단다. 이런 정신이 오늘날 부강한 대한민국을 일구게 한 원동력이고, 우리는 늘 그런 위대한 선조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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