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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석오 이동녕선생의 독립운동 숨결을 느끼며...

상해 임시정부를 가장 오래 이끌고, 임정 초대 대통령 대리까지하신 충남의 자랑

2013.10.23(수) 11:57:47 | 김진순 (이메일주소:dhjsdk44@hanmail.net
               	dhjsdk4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달이 조금 더 지났네요. 독립운동을 이끌어 오며 대한민국 정통 정부의 법통을 이어온 상해 임시정부. 이 임시정부를 가장 오랫동안 이끌어 오신 독립운동가 석오 이동녕선생께서 출생하신 날이 지난달 9월2일이었는데.

도민리포터가 이동녕 선생의 발자취를 취재해 놓고 그때 당신의 출생일에 맞춰 기사를 쓴다는 것이 어찌어찌 하다가 이제야 기사를 씁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기념관 앞 표지석

▲ 기념관 앞에 세워진 선생의 친필 글씨로 만든 표지석 '산류천석-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선생의 기념관

▲ 선생의 기념관


선생께서는 1869년 9월 2일에 이곳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이병옥 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28세 되던 1896년에 독립협회에서 일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만민공동회에서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 7개월간 옥중생활도 하였습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는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하셨고, 당시에 임시정부내 독립운동 방법과 노선을 두고 약간의 갈등이 생겼을때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 여운영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단결력 회복에 힘쓴 인물이시기도 합니다.

기념관 입구 선생의 동상

▲ 기념관 입구 선생의 흉상. 뒤의 태극기 배경이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선생의 초상

▲온화하신 선생의 초상. 그 온화함 뒤엔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과 독립을 꿈꾸는 투사의 강인한 의지가 서려 있어 후세인 우리에게 너무나 큰 감동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이후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 대리가 되었으며 1927년에는 주석이 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직을 거치셨죠.
1937년 중-일정쟁 발발후 항일 투쟁을 전개하며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하고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다 안타깝게도 꿈에도 그리던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채 머나먼 중국 쓰촨성에서 과로로 서거하셨답니다.

나중에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되돌아 보면 선생은 72세로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고 임시정부의 선봉에 서서 대한민국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십니다.

 

선생의 대일항쟁 시대별 연보

▲ 선생의 대일항쟁 시대별 연보
 

사

▲ 교육자이자 언론인이시기도 했던 선생
 

사

▲ 독립선언서 선포 당시의 모습
 

대일 투쟁 방법을 논의하시는 모습

▲ 대일 투쟁 방법을 논의하시는 모습
 

사

▲ 독립협회 참여


기념관 연보에 나오는대로 선생의 시기별 업적을 적어보겠습니다.
 
● 제 1기.
천안에서 탄생한 후 한문을 익히고 상경하여 응제진사에 합격한 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때
-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에 투신 한 뒤 제국신문의 논객을 역임하여 언론창달에 눈뜸
-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박탈되자 상동교회에 들어가 기독교인으로서 조약폐기에 애를 태움
- 이후 북간도(용정)에가서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운영,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섬
 
● 제2시기(1900~1918)
- 국권을 강점당한 전후 해외에 나가 독립투쟁을 전개한 시기
- 부민단, 권업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운영
- 대종교를 민족의 정통사상으로 받아들이고, 동포에게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을 체계적으로 견지

● 제3시기(1919~1940)
- 50대 ~70대까지의 20여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 국내외를 효과적으로 다스려왔던 결산기
- 군주제 청산, 민주공화제를 처음실시하여 의회민주정치의제도적 장치와 그 실천을 진두 지휘했던 법통성의 첫주자
- 세 번의 의정원의장 등 입법부 수반을 역임
- 그 외 각부 총장(장관),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대리, 주석(1935.10~1940.10) 등 행정부수반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한 우익단체의 지도자
- 김구 등과 같이 독립투쟁과 한국독립당 등을 운영조직하면서 10여곳의 임정 수도를 여건에 맞게 이동함
-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막후에서 商決한뒤 김구로 하여금 계획지도케함 →임시정부의 내정, 교통, 군사, 외교, 교육, 문화, 사법, 재정 정책을 적당히 조절 집행하며 내외동포에게 자신감과 용기, 신념을 불어넣어 줌
 
 

선갱의 친필 '대의'

▲ 선생의 친필 '대의'
 

기념관 입구 표지석에 있는 선생의 친필 '천산유'

▲ 기념관 입구 표지석에 있는 선생의 친필 '산류천석'
 

선생의 평소 가르침

▲ 선생의 평소 가르침


스탬프 찍기 체험

▲ 스탬프 찍기 체험


선생에 관해 출판된 책들

▲ 선생에 관해 출판된 책들
 

서

▲ 상해 임정시절의 선생 모습. 맨 왼쪽은 김구선생.
 

민족의 별이 지다... 선생의 타계와 국장 모습

▲ 민족의 별이 지다... 선생의 타계와 국장 모습


선생의 업적중 독립운동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 말고도, 그 중에서 특히 당신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내셨다는 점입니다.

또한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을 할수있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고,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임시정부를 조직해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반 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 광복을 위해 일하시다가 타계하신 것입니다.

 
 

복원된 선생의 생가

▲ 복원된 선생의 생가
 

안채와 사라

▲ 'ㄷ'자형 생가
 

안채의 마루

▲ 안채의 마루
 

서당에서 글 공부하시던 모습

▲ 글 공부하시던 모습
 

생가 앞 너른 마당의 의자에 앉아계신 모습

▲ 생가 앞 너른 마당의 의자에 앉아계신 모습


생가 대문을 들어서면 넓게 마련된 안마당이 방문객을 맞습니다. 띠살문, 용(用)자 창, 그리고 불밝기 창 등이 어우러진 생가 안채는 우리 전통창호의 멋을 조금 느껴볼 수 있습니다.

원래 선생의 생가는 9칸의 ‘ㄱ'자형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복원된 생가지는 ‘ㄷ'자형 집과 ‘一’자형 문간채가 어우러져 튼‘ㅁ'자형 집으로 남아있습니다. 생가의 마당은 의자에 앉은 선생의 동상이 있는데 이 동상 양옆으로 여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생가를 배경으로 선생의 동상과 함께 나란히 앉아 기념촬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툇마루와 대청마루가 있는데 여기에 앉아 잠시동안 독립운동을 위해 반평생 몸을 바친 선생의 숨결과 영혼의 체취를 느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생가 방문 문의 (041)521-3355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면 동리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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