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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국가의 부강함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부산각서석'

2013.08.17(토) 17:53:30 | 이종섭 (이메일주소:dslskj55@hanmail.net
               	dslskj55@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1636년 12월2일 조선 땅은 혹한이었습니다. 이때 조선은 배청친명 정책을 쓰고 있었죠. 청나라는 오랑캐 야만족이라고 칭하면서. 그도 그럴만 한 것이 명나라는 이미 몇 년전 우리가 임진왜란에서 왜군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대군을 이끌고 와서 도와주었기에 그런 명나라에게 의리를 지키는 것은 당연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자 청 태종은 만주족, 몽골족, 한족으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정벌하러 단숨에 내려 왔습니다.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 장차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배꼽 아래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 조선 정벌에 나선 것입니다.

 청군은 심양을 떠난지 10여일 만에 개성을(평양) 지나서 서울 근교에 진입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세자와 함께 강화로 피난을 가려고 했으나 어가 행렬이 남대문까지 나왔을때 이미 청군이 한양 근교에 다달아 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남한산성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청군의 선봉은 결국 내친 김에 16일만에 인조가 피난해 있던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사면을 포위 한 채 인조를 압박했습니다.

 성 안의 조선군과 성 밖의 청나라 군대간에 큰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으나 청군이 겹겹이 들러싼 포위망과, 그 속을 뚫고 나갈 아무런 대책도 없던 인조는 성 안에서 혹한과 굶주림에 지쳐 결국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랑캐인 청나라에 항복을 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항전 할 것을 주장했던 삼학사가 있었습니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 이 3명의 충신들.

 청나라는 조선의 항복을 받은 다음 형제관계를 맺고 돌아가면서 이 3명을 끌고 갑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이들에게 청나라를 섬길 것을 요구하지만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모두 참형을 당하고야 맙니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전말입니다.

 왜 갑자기 병자호란 이야기냐구요?

 병자호란 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내던 백강 이경여 선생은 당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이완, 송시열과 함께 청나라를 쳐야한다는 상소를 올립니다.

 그러자 효종이 그것이 여의치 않음을 알리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에 대해 후손들에게 당시 충신들의 진중한 뜻들 알리기 위해 커다란 바윗돌에 쓴 글씨가 있습니다.

부산각서석이 있는 산 기슭 아래 백마강

▲ 부산각서석이 있는 산 기슭 아래 백마강
 

부산각서석 가는 길의 이정표

▲ 부산각서석 가는 길의 이정표
 

부산각서석이 있는 대재각을 보러 가는 산행로

▲ 부산각서석이 있는 대재각을 보러 가는 산행로
 

산 중턱을 지나 다시 내리막길의 철제 계단.

▲ 산 중턱을 지나 다시 내리막길의 철제 계단.
 

저 아래 부산각서석을 보호하고 있는 대재각이 보입니다.

▲ 저 아래 부산각서석을 보호하고 있는 대재각이 보입니다.


 이름하여 ‘부산각서석’입니다.
 현재 부여군 규암명 진변리 백마강변(금강) 산기슭에는 이 바윗돌에 쓴 글씨인 부산각서석과 함께  이를 보호하고 있는 전각인 대재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부산의 지명 유래

▲ 부산의 지명 유래


 산의 이름이 부산(浮山)인 이유는 이 산이 홍수때 청주에서 떠내려 와 부산(浮山 : 물에 떠 있는 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북벌론자이기도 했던 이경여 선생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내면서 반드시 청나라를 쳐야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부산각서석의 한자원문

▲ 부산각서석의 한자원문
 

대재각 뒤 측면에서 본 부산각서석

▲ 대재각 뒤 측면에서 본 부산각서석
 

대재각 안의 편액

▲ 대재각 안의 편액


 그러자 효종은 그에 대해 “경의 뜻이 옳고 타당하지만 진실로 마음이 아프나 뜻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늦다 (至痛在心 暮途遠意 : 지통재심 모도원의)라고 비답(批答)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져 이경여 선생을 숙청하라는 내정간섭을 하였고 이에 어쩔수 없이 그는 관직을 내려 놓고 부여로 낙향하였습니다.

부산각서석 안내문

▲ 부산각서석 안내문


 그 후 우암 송시열이 이 내용을 여덟 자로 써서 후손에게 전하고자 한 글씨가 바로 부산 각서석에 적힌 至痛在心 暮途遠意(지통재심 모도원의)이란 글입니다.

 이 말의 원문은 誠以至痛在心(성이지통재심) 有日暮途遠意(유일모도원의)이고 이를 모두 풀어서 설명하자면 “정성을 다하여 바른 뜻을 이루고자 하나 (어려운 현실로 인하여) 지극한 아픔이 가슴에 있는데,  날은 이미 저물고 성취를 향한 길은 멀기만 하구나”인데 이를 줄여서 ‘지통재심 모도원의’로 부산각서석에 새겨 놓은 것입니다.

대재각과 부산각서석

▲ 대재각과 부산각서석
 

강변에서 정면으로 본 대재각

▲ 강변에서 정면으로 본 대재각


 숙종 26년(1700)에 이경여의 손자 이명이 그 글을 바위에 새긴 후, 이를 지킬 전각을 지어 대재각(大哉閣)이라 하였는데 글씨의 필체가 힘차고 강건하여 금석문의 자료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합니다.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백강 이경여 선생은 어떤 인물일까요.
 선조때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에도 벼슬을 하던 중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중 인조반정 직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 병자호란 때는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가 이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음을 청나라에서 알게 되어 청나라에 끌려가기 까지 했다가 효종때 풀려 나와 부여로 낙향해 있던중 이런 상소를 올렸던 것입니다.

 멀리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면서 부산각서석의 의미와 함께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그리고 나라의 부강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댁에 있는 자녀들에게 부여에 데려가 부산각서석을 한번 보여주시든가, 아니면 충남도민리포터의 이 글을 읽어 보게 해주시는 갓도 중요한 공부일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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