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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백성을 생각한 제민천교 영세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조선시대 돈 있는 사람들

2013.05.06(월) 11:36:31 | 내사랑 충청도 (이메일주소:dbghksrnjs6874@hanmail.net
               	dbghksrnjs687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비석 하나가 뭐 대단하랴 싶을수 있지만 우리 공주의 제민천 영세비라는 것을 설명드리지 않을수 없다. 이유는 지방자치 시대에 지방의 주인이자 향토를 아끼고 지켜온 주인으로써 고을을 가꿔온 선대이자 고마운 분들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상상의 동물 진묘수'라는 것을 똑같은 모형으로 크게 만들어 놓은 것

▲ '상상의 동물 진묘수'라는 것을 똑같은 모형으로 크게 만들어 놓은 것


우선 공주 공산성을 가기 위해서는 서울, 천안  쪽에서 오려면 구 금강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를 건너기 직전 돼지처럼 생긴 이 기기묘묘한 동물 형상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상상의 동물 진묘수'라는 것을 똑같은 모형으로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상상의 동물 진묘수는 그래뵈도 국보이다.

이곳 공산성 입구에는 공주 시내에 세워져 있던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군수들의 행적을 기리는 선정비 등 43개를 모아 한줄로 세워 놓았다.

비석을 왼쪽 측면에서  바라봄

▲ 비석들을 왼쪽 측면에서 바라봄


수많은 비석들

▲ 오른쪽에서 본 수많은 비석들


공산성 밑에서 바라본 성곽 서문쪽

▲ 공산성 밑에서 바라본 성곽 서문쪽


 

제민천교 영세비

▲ 제민천교 영세비


 그중에 제민천교영세비(濟民川橋永世碑)라는 것이 있다. 이 영세비는 공주 향토문화기념물 제20호다.

제민천교 영세비에 대한 안내 설명

▲ 제민천교 영세비에 대한 안내 설명


 공주시에는 남쪽 금학동에서 발원해 공주시내 한가운데를 관통해서 금강까지 흐르는 맑은 제민천이 있다.

 1817년(순조17년)에 이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재 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 바로 제민천교영세비이다.

비석들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비석들 뒷쪽에서  시내쪽으로 바라본 모습



 이 비석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다리의 복구를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쌓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공사를 모두 완료하였다는 기록을 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업 자금의 조달방법과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을 지원한 강신환 등 10여명의 일반백성 이름도 적혀 있다는 점 때문이다.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공산성과 비석 주변 잘 가꿔진 모습

▲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공산성과 비석 주변 잘 가꿔진 모습



 당시 힘 없는 백성들은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 동원되고, 생업의 와중에도 국가 공통사와 마을 일에 다같이 참여했다. 또한 강신환등 일반인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해 사비를 털어 제민천 공사에 쓰도록 내놓았다는 점에서 가진자글이 어떻게 베풀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기록으로 남겼으니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미 그 당시부터 어떤 하나의 공사에 들어간 인력과 비용, 장비 등을 소상히 기록함으로써 오늘날의 지방자치시대에 소중한 교훈이 될수도 있는 귀감인 것이다.

 영세비를 보면서 당시 고을 수장들이 백성들을 보살피고 아낀 배려와, 가진 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 그리고 행정의 세심함을 다시금 느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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