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잊지 못할 누님의 책 선물과 함께 써 보내준 손글씨 편지

정성을 담아 절절하게 써준 편지가 오늘날 나의 삶의 지표가 되어...

2013.03.27(수) 11:35:02 | 내사랑 충청도 (이메일주소:dbghksrnjs6874@hanmail.net
               	dbghksrnjs687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잊지못할누님의책선물과함께써보내준손글씨편지 1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릴적에 서울로 돈 벌러 나간 누님이 내게 당시의 월간지 ‘소년중앙’과 ‘어깨동무’라는 만화책을 사서 보내 주셨던 일을.

 그때 시골에서 소년중앙과 어깨동무는 구경하기 힘든 책들이었기에 나는 매달 그 책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우체부 아저씨가 먼발치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것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쿵쾅거렸으니까.

 반갑게 받은 누님의 소포. 책이 담긴 소포를 뜯어 밤새 읽다가 이불속에서 꼭 끌어 안고 잠을 잤다. 다음날엔 학교에 가서 자랑하기에 바빴다. 아이들은 너나 없이 책좀 빌려달라고 줄을 섰고 나는 그 책 덕분에 요즘 아이들 말로 ‘짱’이 될수 있었다.

 아이들은 책을 보고 싶어서 내 앞에서 줄을 섰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나는 구슬을 ‘뇌물’로 받거나 유리창 닦는 청소당번을 대신 해 주는 아이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횡포’를 부리기까지 했다.

 누님 덕분에 평생에 딱 한번 짱이 되어 볼수 있었던 초등학교 그때, 누님은 내게 책을 보내면서 반드시 글씨로 편지를 함께 써서 보내주셨다.

 초등학교만 나오신 누님이니 어느 문필가 같은 화려한 문장도 아니고, 글씨체 역시 멋지고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님은 있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시골에서 공부하는 동생을 위해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거라, 농사 짓는 아버지에게 효도 하는 일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책도 많이 읽고 친구도 좋은 사람 사귀어라 같은 것들 이었다.

 누님은 마치 어머니처럼 그렇게 자상하셨고 다정다감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들판으로 나가 농삿일을 하시다 보니 자식들 건사하기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누님은 서울로 돈 벌러 나가기 전까지 집안 일은 거의 다 맡아 했었고 어머니같은 역할을 했다. 그때 농촌의 생활상이나 살림살이가 다 그랬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그때 누님이 책과 함께 써서 보내주신 편지글이 내 삶의 지표가 되었던것 같다. 내가 어그러지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사춘기 중고등학교 때에 친구들과 어울려 엉뚱한 짓을 할 기회도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누님이 공장에서 야간작업 하며 번 돈으로 학비를 대 주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내주신 그 편지가 떠올라 허튼 짓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산업화가 들불처럼 일어나던 그때, 농촌에서  너나 없이 서울로 올라가 돈 벌던 시절이었는데 누님처럼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일컬어 ‘공순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지금이야 그런말 안쓰지만 그런 소리 들어가며 가족과 동생을 위해 일했던 누님이 정성과 함께 가슴속의 절절한 마음을 담아 써 보내주신 편지였으니 천하의 정신 나간 인간이 아니고서야 그 당부의 말을 거역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누님의 은혜를 잊지 못하며 누님의 삐뚤빼뚤 쓴 편지 글이 눈에 선하다. 벌써 수십년전 일이지만 그 싯누런 갱지에 볼펜으로 썼던 글씨체와 편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누님의 편지가 내 인생의 지표가 되었고, 학교에서 참 많이 썼던 편지는 국군에게 보낸 위문편지와 성인이 되어서 했던 펜팔이라는게 있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선데이 서울 같은 잡지에 내 주소와 이름을 올려 달라는 펜팔 요청 엽서를 보내고 나면 거짓말이 아니고 하루에 5통도 날라온다. 우체부 아저씨가 짜증을 낼 정도로 많은 편지가 거의 두달 가까이 매일매일 책상에 수북히 쌓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남녀들은 참 낭만 있었다. 누군지도 모를 생면부지인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내어 편지를 써서 보냈으니. 또한 그렇게 펜팔코너에 오른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편지가 배달이 되어 답장 받기도 어렵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솔직한 자기 감정을 담아 편지를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 2013년이 되었다.
 이제는 과거에 편지좀 써 본 어른들마저 편지를 안쓴다. 그나마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써 넣었던 도시락 편지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이젠 학교 단체급식을 하다보니 죄다 사라졌다.

 아이 어른 할것 없이 편지 쓸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빼앗긴 지금, 우리의 정서가 너무나 메말라 가고 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최근에 모교 개교기념일 행사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만난 수십년전 동창생 녀석이 반갑다고 인사하며 건넨 말은 나를 살짝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 네가 방학때 써 보낸 편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임마”
 세상에, 나는 기억조차 못하는 수십년전 편지를 가지고 있다고? 무슨 내용을 썼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슬그머니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멋진 말을 써 보겠다며 어느 시집에서 베껴 쓴 내용이 절반은 될텐데...

 낯이 후끈거리기는 했지만 나를 그렇게 기억해 주는 친구에게 참 고마웠다. 
 어른들도 가끔은 멀리 계신 부모님과 내 가족, 혹은 부부끼리는 물론이고 친구나 지인에게  손으로 정성들여 편지를 써 보내 보자.

 뭔가 새록새록 옛 추억도 떠오르며, 잠시동안이나마 마음을 정화하고 가다듬는 시간이 될것이다. 또한 그동안 잊고 지내던 먼 옛날의 그것들이 타임캡슐이 되어 내 가슴에 안길지도 모른다.

 학창시절에 달달달 외웠던 청마 유치환의 시 한구절.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내사랑 충청도님의 다른 기사 보기

[내사랑 충청도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