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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둘레길과 물한산성 가는 길을 걷다

2020.12.25(금) 17:07:21설산(ds3keb@naver.com)

잡목 사이로 지는 겨울 해
▲물한산성을 들러 내려오던 길 잡목 사이로 지던 겨울해 

제주 올레길 이후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역사와 테마가 있고 볼만한 풍경이 있는 걷기 좋은 길을 만들어 놓아 전국은 가히 길 열풍이다.   

무슨 인연인지 내가 12년째 거주하고 있는 아산에도 둘레길이 있어 얼마 전 걸었던 이순신 백의종군길에 이어 현충사둘레길 탐방을 위해 다시 찾은 현충사는 다소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주차장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정문도 한가하다.
 
현충사둘레길 출발지점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자라오신 마을'이라는 백암1리 마을을 가리키는 표지석을 보니 외가가 있던 이 마을에서 장군께서 청소년기에서부터 1576년 32세 무과 급제로 훈련원봉사 견습생으로 이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당시의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생각해 본다.
 
이순신 장군께서 자라오신 마을 백암1리 가는 길 표지석
▲이순신 장군께서 자라오신 마을 백암1리 가는 길 표지석
 
현충사 둘레길 충무교육원 가는 길
▲현충사둘레길 충무교육원 가는 길

충무교육원 울타리를 끼고 언덕을 오르다 보니 마을의 뒤편으로 높이 167m의 야트막한 방화산이 둘러있고 그 산줄기가 좌·우로 퍼져나가 좌청룡, 우백호 역할을 하여 아늑하고, 남쪽으로 난 마을 앞 들판 너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곡교천이 흐르는, 배산임수로 길지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현충사 둘레길에서 본 백암1리 모습
▲현충사둘레길에서 본 백암1리 모습

모두가 사라진 한겨울 산길은 온통 생명을 다한 마른 나뭇잎들 위로 살짝 내린 눈이 덮여 있고, 화려한 날들을 보낸 숲속에는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앙상하게 우거진 잡목들이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있다. 그러다 나타난 대나무숲의 녹색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현충사 둘레길 대나무 숲 구간
▲현충사둘레길 대나무숲 구간
 
방화산 뒤편 수한산 물한산성 갈림길에서 현충사둘레길로 접어들면 나타나는 산불감시 초소 부근에는 3·1 독립운동 당시 이곳에서 봉화를 올려 시위에 동참한 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이 있다. 검색해 보았더니 1919년 3월 31일 밤 백암리 주민 50여 명이 횃불을 들고 동리에서 가장 높은 방화산 꼭대기에 모여 봉화를 피우고 한마음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던 모양이다.
 
현충사 둘레길
▲현충사둘레길
 
염치 방화산 봉화 만세 시위 현장 표지석
▲염치 방화산 봉화만세 시위현장 표지석
 
그날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 보니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고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커다란 공장이 들어서 있어 그 당시 풍경을 잘 모르긴 해도 천지개벽이고 상전벽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싶다.
 
방화산에서 본 천안과 아산 탕정의 모습
▲방화산에서 본 천안과 아산 탕정의 모습
 
방화산 정상을 지나면 현충사 경계 울타리를 따라 난 길을 걷게 된다. 울타리 너머 현충사 안에는 키 큰 노송들이 비탈진 솔밭을 이루고 소나무 사이로 장군의 막내아들 이면의 묘소가 눈에 들어온다. 현충사 안쪽으로는 훈련생들을 인솔해서, 또는 옛집 앞뜰에 매화가 피는 봄날이면 사진기를 들고 와서 묘소로 가는 계단을 올랐었는데 바깥 울타리 너머로 보는 묘소는 적막하다.  
 
현충사 경계 울타리 옆 소나무 길
▲현충사 경계 울타리 옆 소나무길
 
현충사 울타리 너머 이면의 묘소
▲현충사 울타리 너머 이면의 묘소

장군의 막내아들 이면은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해 장군께서 지극히 사랑하던 아들이었다고 한다. 이런 아들이 명량해전에서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게 대패당한 왜군이 복수하기 위해 충무공의 본가가 있는 아산을 공격할 때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장군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애끊는 심정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14일(1597년 10월 14일) 신미. 맑음.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 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구나.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구나. 나는 세상에 살아 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이날 장군께서는 소금창고에 들어가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소금 가마니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의 힘이 모자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거나 침략당하는 일은 이렇듯 많은 아픔과 슬픔을 남기는 일이어서 다시는 치욕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하는데 ‘국민통합’을 이루지 못한 나라의 현실이 걱정된다.
  
그렇게 현충사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 현충사 후문으로 내려왔더니 해는 아직 중천이고 아쉬움이 남아 물한산성을 가보기로 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물한산성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 어디엔가 크리스마스 트리로 쓰면 좋을 것 같은 구골나무가 성성한 녹색 잎을 반짝인다.
  
물한산성 가는 길 안내판
▲물한산성 가는 길 안내판
 
구골나무
▲구골나무
 
물한산성 가는 길
▲물한산성 가는 길
 
물한산성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
▲물한산성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
 
얼마나 걸었을까, 낙엽에 덮여 있는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설마 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물한산성’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어 허탈하다. 내가 가본 산성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는 형태가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이곳이 산성이었다고 말해주는 것은 고작 10m 남짓한 돌담뿐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그래도 한때는 높이 3m, 둘레가 430m 정도 되는 어엿한 산성이었는데, 덧없이 흐르는 세월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딱딱딱’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딱따구리가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지 산성 앞 나무를 열심히 쪼고 있다.
 
물한산성 안내판
▲물한산성 안내판

물한산성
▲물한산성

물한산성 앞 나무 위 딱따구리
▲물한산성 앞 나무 위 딱따구리

되돌아 내려오는 길, 붉게 물든 서쪽 하늘 잡목 사이로 노루 꼬리 같은 겨울 해가 걸려 있다.
     서쪽 하늘로 지는 해
▲서쪽 하늘로 지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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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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